백지 위임장을 줬다가 벌어지는 일
위임장 마스터·8분·
빈칸을 남긴 종이는 돌려받는다고 원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채워져 밖으로 나간 종이를 보고 거래한 사람이 있으면, 맡긴 적 없다는 말만으로 그 거래를 지울 수 없습니다. 위험의 크기는 어느 칸을 비웠느냐로 갈립니다.
권한을 정하지 않은 대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민법 제118조가 두 가지로 한정합니다 · 대리권 소멸은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합니다(제129조) · 위임장 분실·회수 절차를 정한 법령은 없습니다
백지로 건네며 세워 둔 대비
- 아는 사이니 필요한 칸만 채우고 나머지는 그대로 둘 것이다
- 중요한 일이면 나에게 다시 물어보고 진행할 것이다
- 일이 끝나면 그 종이를 돌려받으면 된다
- 도장만 찍힌 종이라 창구에서 알아서 걸러 줄 것이다
- 정 안 되면 위임장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하면 된다
그 대비가 닿지 않는 자리
- 무엇이 채워졌는지는 종이를 받아 든 쪽에서만 보인다
- 본인에게 다시 확인할 의무를 거래 상대가 지는 것은 아니다
- 회수해도 그 사이에 맺어진 거래는 그대로 남는다
- 창구가 보는 것은 지정된 서식과 첨부 서류이지 두 사람의 사정이 아니다
- 위임장 분실·회수에 관한 법정 신고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비웠는지부터 갈라야 합니다
백지 위임장은 한 종류가 아니라 비운 칸의 수만큼 종류가 있습니다.
빈칸을 남긴 위임장을 뭉뚱그려 부르다 보니 위험도 하나로 뭉쳐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문제가 벌어지는 방식은 어느 칸이 비어 있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위임장에 들어가는 칸은 대체로 네 덩어리입니다. 누구에게 맡기는지, 무엇을 맡기는지, 언제 쓰는 종이인지, 어느 절차에 내는 종이인지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비우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의 판단이 들어옵니다.
들어오는 판단의 주체가 매번 같지도 않습니다. 대리인 칸이 비면 그 종이를 손에 쥔 사람이 스스로를 채워 넣고, 범위 칸이 비면 거래 상대가 그 종이를 자기 나름대로 읽습니다. 날짜 칸이 비면 나중에 그 종이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아무도 확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비도 칸별로 세워야 합니다. 전부 다 채우기 어렵다면 최소한 어느 칸을 비웠을 때 무엇이 열리는지는 알고 건네는 편이 낫습니다.
비운 칸마다 열리는 문이 다릅니다
같은 백지라도 대리인 칸을 비운 것과 범위 칸을 비운 것은 성질이 다릅니다.
아래 표는 자주 비워 두는 네 칸을 놓고, 그 칸이 비었을 때 무엇이 열리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오른쪽 칸은 그 상태로 밖에 나갔을 때의 위험을 표시한 것입니다.
표를 보기 전에 한 가지를 정해 두면 읽기가 쉽습니다. 위임장은 권한을 만들어 내는 물건이 아니라 이미 준 권한을 밖으로 드러내는 물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빈칸은 권한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권한이 얼마인지 밖에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특히 두 번째 줄을 눈여겨보십시오. 범위를 비워 두면 무엇이든 맡긴 것이 될 것 같지만 법의 출발점은 정반대입니다. 권한을 정하지 않은 대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재산을 지키는 행위와 대상의 성질을 바꾸지 않는 이용·개량행위 둘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 비워 둔 칸 | 그 칸이 비면 열리는 것 | 밖에 나갔을 때 |
|---|---|---|
| 대리인 성명 | 종이를 쥔 사람이 자기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습니다 | 누가 대리인인지 뒤늦게 다투게 됩니다 |
| 위임 범위 | 출발점은 좁지만 채워지면 그 내용으로 읽힙니다 | 처분에 해당하는 문장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 작성 날짜 | 언제 만들어진 종이인지 확정되지 않습니다 | 권한이 살아 있던 때인지 가릴 수 없습니다 |
| 제출처·용도 | 다른 절차에 그대로 돌려 쓸 수 있습니다 | 한 번 쓰고 끝날 종이가 여러 창구를 돕니다 |
| 위임인 서명·날인 | 채워 넣기 전에는 위임의 표시로 보기 어렵습니다 | 비어 있으면 오히려 접수되지 않습니다 |
마지막 줄만 표시가 반대인 이유가 있습니다. 위임인 쪽 서명이나 날인이 빠진 종이는 대개 창구에서 그대로 돌아옵니다. 비어 있어서 위험한 칸이 있고, 비어 있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칸이 따로 있는 셈입니다.
정리하면 위험한 것은 위임인이 이미 자기 표시를 해 둔 상태에서 남은 빈칸입니다. 표시가 되어 있으니 밖에서는 완성된 서류로 보이고, 빈칸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채워집니다.
왜 되돌리기가 어려운가
맡긴 적 없다는 주장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통해도 밖에서는 잘 통하지 않습니다.
빈칸이 채워져 거래가 이뤄지면 세 사람이 한자리에 놓입니다. 종이를 건넨 본인, 그것을 채운 대리인, 그리고 그 종이를 보고 거래한 상대방입니다. 되돌리기가 어려운 이유는 마지막 사람 때문입니다.
민법은 권한 밖의 행위라도 상대방 쪽에 그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사정이 있었다면 본인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길을 열어 두었습니다. 표현대리라고 부르는 구조이며, 요건과 판단 기준은 백지 위임장의 법적 위험을 정면으로 다룬 글에서 조문과 함께 따로 짚었습니다.
여기서는 결론만 확인해 두면 충분합니다. 대리인이 선을 넘었다는 사정만으로 본인이 자동으로 빠지지는 않습니다. 이 결론을 모르면 이후의 대응이 전부 어긋납니다. 종이만 되찾으면 된다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권한이 사라진 뒤에 쓰인 경우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대리권이 소멸했다는 사실은 그것을 몰랐던 상대방에게는 내세우지 못합니다. 다만 상대방이 부주의해서 몰랐던 경우까지 보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지가 애초에 접수되지 않는 창구
빈칸을 남긴 종이가 아예 통하지 않는 절차가 따로 있습니다.
일반적인 위임장에는 법령이 정한 용지나 항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절차에 따라서는 법령이 별지 서식을 지정해 두었고, 그런 창구에서는 지정된 칸을 채우지 않으면 접수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엄격한 쪽은 인감증명서 발급입니다. 대리인이 신청할 때 내는 위임장은 인감증명법 시행령이 정한 별지 서식이며, 위임자가 직접 손으로 써야 합니다. 대리인이 대신 작성해 온 종이는 수리되지 않습니다. 이 자필 요건은 2020년 2월 18일 시행령 개정으로 서식에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행정기관 민원 일반은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이 별지 제3호서식을 두고 있고, 주민등록표 열람·등초본 교부는 주민등록법 시행규칙 별지 제9호서식을 씁니다. 뒤의 서식에는 위임한 사람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세대주 성명, 주소를 적게 되어 있고 서명 또는 날인이 필요하며 지문은 쓸 수 없습니다.
진료기록 열람·사본 발급은 의료법 시행규칙 별지 제9호의3서식이 위임장이고 별지 제9호의2서식이 동의서입니다. 의료기관 실무 안내는 환자 본인의 자필 서명을 요구하며 도장이나 지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빈칸을 남겨 건네는 방식이 이런 창구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건넸다면 무엇을 할 수 있나
되찾는 일과 권한을 끊는 일은 서로 다른 동작입니다.
빈칸을 남긴 종이를 이미 건넸다면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할 일은 종이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권한 자체를 끊는 것입니다. 대리권은 원인이 된 법률관계가 끝나거나 본인이 수권행위를 철회하면 사라지며, 철회에는 상대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이 종이의 회수입니다. 다만 회수는 권한을 끊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끊긴 권한이 밖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정리 작업입니다. 순서를 뒤집어 종이만 받아 두면 권한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회수해도 남는 구멍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앞서 본 것처럼 대리권이 사라졌다는 사정은 그것을 몰랐던 상대방에게 내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이가 이미 여러 곳을 돌았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 종이를 받아 볼 만한 곳에 위임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갈라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대리인이 빈칸을 채운 것과 남의 이름을 꾸며 문서를 만든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앞의 것은 대리의 문제이고 뒤의 것은 형법이 다루는 문제입니다.
회수는 정리 작업이지 권한을 끊는 행위가 아닙니다. 철회 의사를 밝히는 일이 먼저이고, 이미 밖에서 이뤄진 거래는 회수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종이를 쥔 사람이 자기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방식의 위험입니다. 누구를 대리인으로 세웠는지 뒤에 다투게 됩니다.
형식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위임의 표시로 읽힐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별지 서식이 지정된 절차에서는 그 서식의 칸을 채우지 않으면 접수되지 않습니다.
백지 위임장을 다루는 요령은 결국 두 가지로 좁혀집니다. 비울 칸을 줄이는 일과, 건넨 뒤에 그 종이의 수명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해도 위험은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반대로 둘 다 하지 않으면 종이는 계속 밖에 남습니다.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본 사람에게 여전히 유효한 서류로 보인다는 점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백지 위임장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나요?
금지 조항은 없습니다. 다만 인감증명서 발급이나 주민등록표 열람처럼 법령이 별지 서식을 지정한 절차에서는 그 칸을 채우지 않으면 접수되지 않습니다.
범위를 비워 두면 대리인이 뭐든 할 수 있나요?
출발점은 정반대입니다. 권한을 정하지 않으면 재산을 지키는 행위와 성질이 변하지 않는 범위의 이용·개량행위만 남습니다. 다만 빈칸이 채워지면 밖에서는 그 내용으로 읽힙니다.
인감증명서 발급 위임장도 비워서 건네도 되나요?
안 됩니다. 위임자가 직접 손으로 작성해야 하며 대리인이 대신 써 온 것은 수리되지 않습니다. 2020년 2월 18일 시행령 개정으로 서식에 자필 요건이 드러났습니다.
잃어버린 위임장을 신고할 곳이 있나요?
위임장 분실이나 회수 절차를 정해 둔 법령은 없습니다. 수권행위를 철회하고 그 사실을 알릴 만한 곳에 알리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대리인이 빈칸을 마음대로 채웠으면 무효 아닌가요?
본인과 대리인 사이에서는 다툴 여지가 있지만, 그 종이를 보고 거래한 상대방과의 관계는 따로 판단됩니다. 표현대리가 성립하면 본인이 책임을 집니다.
빈칸을 남겨야만 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맡기는 일의 종류와 쓸 수 있는 기간, 제출처를 한 줄이라도 적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종이에 남지 않은 제한은 밖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