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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망하는 천자문 |  | |
| 천자문(千字文)에 무엇이 숨어있나?
중학교에 입학할 때 아버지가 당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한문(漢文) 공부가 힘드니까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야기는 틀렸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수학이 강조되었고, 학교 밖의 사회에서도 영어가 다수파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천자문은 나에게 펜글씨 교본을 따라 썼던 추억만으로 남아있다. 「욕망하는 천자문」은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포스트모던이 창궐하는 현 시점에서 골방 먼지 속에 묻혀있던 천자문을 다시금 꺼내들고 있다. 왜 하필 지금 천자문인가? 그리고 어째서 천자문에 ‘욕망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까?
#풍경1. 사람들이 중국을 읽고 있다. 서점가에는 중국 관련 서적들이 즐비하고, 중국관련 정보들과 중국의 고전 사상들이 새롭게 해석되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세계화’라는 새로운 질서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만 하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세계화’의 경쟁과 속도에 반하는 전통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풍경2. 천자문이 현재 우리 교육의 중심적인 텍스트가 아니고 시골버스 정류장 가판대에서나 팔리는 촌스런 것이라 해도 무시해도 좋은 것일까? 여전히 주변 시장에서 알게 모르게 팔리고 있다는 것은 천자문이 지닌 세계와 비전을 향수하고 있음을, 대중이 은밀히 욕망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시장의 중심에 있지 못하는 이런 은밀한 욕망이야말로 무의식적 욕망일 가능성이 크다.
이 두 풍경의 겹침 속에서 저자는 천자문 속에 숨어있는 세계에 대한 비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억압되었다가 다시 회귀하는 무의식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시 중국의 시선 또는 권력의 시선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중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는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경증을 앓는 환자에게 그의 고통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정확히 알려주면 그의 아픔은 의외로 쉽게 치료된다. 나는 오늘날 너무나도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겪는 정신적 갈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오랜 기간 방치된 무의식의 창고에서 천자문이라는 잊혀진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머리말에서)
천자문은 원래 산문으로 지어졌으나 나중에 운을 넣어 사언고시(四言古詩)의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따라서 외우기가 쉽고, 일천 자 안에 역사, 천문, 기상, 지리, 인물 등에 관한 정보들과 윤리, 처세, 지혜, 사상 등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고전의 주요 테마인 문·사·철을 모두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장점 때문에 천자문은 당시 우리 사회의 봉건윤리를 의식화하는 학습의 장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회 운영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학습 도구였던 천자문이 쉽게 사라질 리가 없다. 회초리를 통한 신체적 훈육을 통해, 그리고 전승을 통해 천자문의 세계는 지금도 우리의 심층적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구절을 매일 외운다면, 그 시각적 코드 속에서 지아비 부(夫)와 지어미 부(婦)가 대립적으로 구별되는 것을 지각하게 될 것이고, 창(唱)과 수(隨)의 청각적 코드 속에서는 위로 뻗을 창(昌)과 떨어질 추(墜)가 같은 운으로 연상되면서 부(夫)와 부(婦)가 차별적으로 인식된다. 천자문이 특별히 우리의 인식에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바로 이 책이 이처럼 유기적으로 꽉 짜여진 시적 텍스트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P.688)
「욕망하는 천자문」은 ‘문자 속에 숨은 권력, 천자문 다시 읽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천자문 사언고시를 하나 하나 뜯어가며 해체시킨다. 사언고시 안에 숨어있는 의미를 물어 권력의 시선을 해체시키고, 천자문을 새롭게 읽을 가능성을 열고 있다. 천자문을 촌스런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의식적 심층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은 천자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사상의 기본적 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목적을 두고읽든지 간에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히고, 박학다식을 선물한다. (이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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