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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레이션 |  | |
| 700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림책
사진이 발명된 1866년 전까지만 해도 화가들은 목판에 글을 거꾸로 새겨 넣어야 했다. 그 정도면 쉬운 편이다. 그림을 찍어내기 위해선 동판에 정확한 사이즈로 거꾸로 그려 넣는 힘든 작업을 해야 했다.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수많은 그림을 만들어내는 요즘 환경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컴퓨터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엇을 그릴 것인가는 사람의 몫이다. 아직까지 컴퓨터는 인공지능이 아니다. 단 한 컷의 그림 속에 수만 가지 생각을 담아내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보고 있으면 인간과 똑같이 사유하는 컴퓨터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인간에겐 컴퓨터가 가지지 못한 ‘마음’과 ‘유머’가 있으니까.
「일러스트레이션」은 인간의 유머와 마음이 그림 속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굴벽화에서부터 컴퓨터 일러스트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를 꼼꼼히 짚고 있는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위한 교본으로도 훌륭하지만 ‘소통’을 향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역사이기도 하다. 일러스트레이션의 가장 큰 특징은 ‘소통’에 있다. 그걸 ‘상업적인 미술’이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통되지 못하는 문화’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공저자 줄리 리버맨의 한마디는 이 책의 핵심을 알려준다.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 것이 있다면, 평평한 그림은 단지 눈에만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완전함과 역동성을 가지고 그 단조로운 평면성을 채우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으로만 볼 수 있는 추론에 의한 현실인 것이다.”
이 말이 일러스트레이션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림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림의 형식이나 기법을 넘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가진 모든 미술을 일러스트라 부른다면 이 말은 정확히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가진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란 얘기다.
모든 일러스트레이션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물을 그린 단순한 캐리커처라 하더라도 그 얼굴 속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광고 속의 그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700여 장이 넘는 이미지들이 수록된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러니 700여 개의 이야기가 담긴 거대한 ‘이야기책’이라 할만하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며 그림으로 세상을 논평하는 비주얼 저널리스트들인 셈이다. 그러니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미술가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거나 디자이너보다 소극적이라는 편견은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됐다. 일러스트레이션이 그저 동화책을 예쁘게 꾸미거나 세상을 감상적으로 포장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편견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의 한 순간을 포착해 사회의 숨겨진 부분을 탐구하는 줄리언 앨런 등의 에세이스트나 정치적 상황들을 캐리커처로 환상적으로 묘사하는 랄프 스테드만의 작품을 보며 누가 ‘그저 아름다운 그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를 시기별로 구분하지 않고 만화, 심리학, 사회참여 등의 주제별로 책을 편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해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소홀한 것은 아니다. 각 장의 말미에는 ‘기법과 재료’, ‘과제’등을 추가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일러스트레이션〉장의 후반에는 줄리언 앨런의 저널리스틱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직접 실습이 가능하도록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 식이다. 또 하나 눈길이 가는 대목은 마지막 장인 〈전문 직업으로서의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이 장에는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한 요건이나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자질, 작자와 사용자 보호에 대한 상식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인 정보를 빼곡하게 담았다. 맨 마지막에는 계약서 샘플까지 첨부했다. 이 책이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작은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중혁 vonnegut@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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