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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녀들 봉기하다 |  | |
| 「하녀들 봉기하다」에 나오는 김기영 감독의 일화는 그의 기기묘묘한 영화들의 사회적·심리적 탄생배경들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쓴 영화평론가 이효인이 김기영 감독을 처음 만났던 1993년 어느 날, 김기영 감독은 인터뷰 도중 글쓴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긴다. 엄연히 손님이었을 글쓴이에게는 일언반구 같이 먹자는 말도 없이. 그때 글쓴이는 이런 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본의 아니게 식탁 위를 흘낏 쳐다보는 순간 나는 저녁 식탁에 초대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덩그마니 뚜껑이 젖혀진 꽁치 통조림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가운데에는 꽤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이 보이는 떡 한 접시와 밑반찬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p.148)
‘하녀’(1960),‘화녀’(1971),‘충녀’(1972),‘이어도’(1977),‘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그리고‘바보사냥’(1984)까지. 일그러진 성과 정욕, 편집증적인 욕망이 괴이한 이미지들을 통해 표출되는 김기영의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사 최초로 ‘재발견’된 작품들이다. 그 계기가 된 건 199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회고전 덕분이지만, 그 이전에도 소수의 영화 마니아들은 그의 영화에 열광했다. 멜로영화라는 장르의 관습을 빌려 전혀 멜로영화 같지 않은 초유의 의식 실험을 감행했던 마술적인 영상들. 20세기 한국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통과해낸 그의 작품들은 관제사회의 예술적 무지와 억압을 충만한 개인적 욕망의 알레고리로 승화시켰다. 「하녀들 봉기하다」라고? 이런 유치하면서도 적나라한 제목이라니. 하지만 이 제목은 김기영의 영화와 너무도 잘 맞아떨어진다.
“김기영 감독은 여자들을 여러 차원에서 관음증의 대상으로 등장시키거나, 관객의 욕망을 대리 분출시키는 기제로, 사회적 주제를 제기했다가는 곧 본능의 욕구로 치환되는 소비재로, 그리고 견고한 계급사회의 도덕성에 균열을 냄으로써 위기를 조성했다가는 다시 봉합함으로써 위기감의 해소 또는 안도감을 안겨주는 소재로 사용했던 셈이다.” (p.125)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고려장’(1963),‘렌의 애가’(1969)등의 문예영화들도 적잖게 찍었지만, 김기영의 영화적 개성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건 밀폐된 공간에서 프로이트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남녀들이 ‘육욕의 아수라장’(p.93)에서 분탕치듯 파멸해 가는 모습을 파괴적으로 형상화할 때였다. 김기영 스스로가 심리주의라고 말한 그런 작품 경향이 본격적으로 시도된 작품이 바로 1960년작 ‘하녀’다. 이 작품은 이후 김기영의 필모그라피에서 여러 형태로 변주되고 리메이크된다. 김기영의 이런 기묘한 악취미는 그가 경성제대 출신의 의사였던 전력과 관련 있다. 그는 자연과학자의 냉철하고 엄밀한 시선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투시하면서 거기에 근대화의 질곡 속에서 좌충우돌하던 남한의 정치·경제적 혼란들을 뒤섞어 인물들의 역조화를 부추긴다. 그러면서 욕망은 과잉되고 일그러지면서 사회적 틀 속에서 신음하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군부공화국의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치고는 범상치 않은 예술성과 도전정신이 느껴지지만, 김기영 스스로는 자기 작품들이 단지 ‘돈 때문에’ 만든 것들이라고 말하면서 껄껄 웃는다. 그런데 그게 괜한 너스레나 겸양을 가장한 자만심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시대가 받쳐주지 못하는 예술정신에 대한 은근한 자조랄까. 김수용, 신상옥 등과 한국 영화 르네상스기의 트로이카로 명성을 날렸지만 김기영은 평생을 치과의사였던 아내 김유봉의 경제적인 도움 없이 살지 못했다. 김수용 감독의 경우 ‘김수용 감독을 만나러 간다면 특별히 부인이 5만원을 준다고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그의 모습’(p.149)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하녀들 봉기하다」는 괴팍하고도 순진무구했던 한 불운한 예술가의 일생을 과장되지 않은 경배의 어조로 찬찬히 훑는다. 지인들의 회고와 글쓴이의 감상과 섬세한 작품분석이 곁들여져 한 불세출의 영화감독의 일생을 다각도의 시점으로 조망함으로써 영화와 인생의 의미를 깊이 있게 재고할 수 있게 만든다. ‘재발견’된 지 고작 두 해만에 노구를 이끌고 새로운 영화(이지은 주연의 ‘악녀’)에 도전했던 김기영은 그러나 불의의 화재사고로 급사한다. 의대동기로서 평생을 반려했던 부인과 함께였다. 시신이 발견된 건 향년 여든이 되던 겨울 아침이었다. (강정 igguas@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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