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피의 문화사 |  | |
| 역겹거나 처절하지 않은 피의 박물학
피는 몸 안에서 보이지 않게 윤활할 때 생기와 활력을 추동하는 물질에너지로 작용하지만, 그것이 밖으로 터져나왔을 땐 죽음과 파멸을 암시한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선연하게 분할된 표지가 인상적인 「피의 문화사」는 바로 세계의 표면으로 떠오른 피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다.
글쓴이 구드룬 슈리의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아마추어의 저술이다. 그녀는 ‘딜레탕티슴’이란 표현으로 이 책의 계통없음, 산만함, 자유분방함을 옹호한다.
“괴테 역시-스케치에서 기상학, 고전학, 동양학을 거쳐 물리학에 이르기까지-다방면에 도전한 인물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위대한 문화학자의 반열에 낄 수 있었다. 그는 전체를 설명하겠다는 도전의식으로 사소한 부분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p.11)
그런 그녀가 문화사의 시금석으로 삼은 덕목은 ‘철학적인 진리애’‘탐정에 버금가는 예민한 감각’‘과감한 발상’등이다. 글쓴이는 ‘피’라는 테마를 놓고 역사학, 문학, 철학, 의학, 신학, 영화, 신화 등 문화사의 모든 범주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실존인물과 허구 속의 인물들이 동위선상에 놓이며, 객관적인 의학자료들이 글쓴이의 자유분방한 상상과 가설 속에서 분방하게 ‘재창조’된다.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런 독서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혼란스러움은 기존의 선형적인 독서 방식에 대한 의도적인 도발로 여겨지기도 한다. 온통 피로 점철돼 있음에도 가볍고 경쾌한 독서가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언제 어디서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앞뒤 내용의 구애없이 피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매력적이지만, 피상적이고 흥미본위로 쓰여졌다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미묘한 한계점 위에서 이 책은 현란하게 춤춘다. 비판을 하든, 동조를 하든 이런 식의 저술은 키워드 하나로 모든 정보망이 네트워킹되는 인터넷 시대의 정보유통과도 닮았다.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의 역사는 피와 뗄레야 뗄 수 없다. 피는 인체 내부의 에너지 저장소, 즉 심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렇듯 피의 박동은 삶의 기저로 작용하지만, 그건 인체의 내부에서나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뿐, 밖으로 분출됐을 땐 죽음과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몸 밖으로 피가 분출되는 순간, 인간의 어두운 배면이 들춰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숱한 예술작품들에 나타나는 피의 이미지와 핏빛 비극은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필수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책에서 피의 역사와 관련해 글쓴이가 언급하는 문학작품은 호머의 「일리어드」를 필두로 「마의 산」을 비롯한 토마스 만(글쓴이는 토마스 만의 열혈독자인 듯, 그의 소설은 매장마다 심심찮게 인용된다)의 여러 작품들, 그리고 최근의 「해리 포터」시리즈까지 실로 방대하다. 영화사의 고전으로 알려진 무르나우 감독의 흡혈귀 영화 ‘노스페라투’와 다양한 뱀파이어 무비들도 빠지지 않는다. 엘사스 보병연대의 중대장 아르투어 딘터가 쓴 소설 「피를 거역한 죄」등 피의 우생학이라 일컬어지는 나치즘 관련 소설들도 여러편 인용된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실제로 뱀파이어라고 주장하는 영국인 빅터. D와의 인터뷰를 담은 7장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매우 흥미롭다. 다종다양한 정보와 유쾌한 지식의 유희가 공존하는 이 책의 특징을 가장 명징하게 나타내는 장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모든 정보에 달통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다른 정보와 연계점을 재빨리 찾아내는 기민함이 돋보인다. 굳이 비유하자면, 수많은 연결고리와 기관들을 거쳐 촘촘하게 연결된 혈관들과 닮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피와 관련된 끔찍한 사유와 이미지들이 넘쳐남에도 그닥 처절하거나 어두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본래의 빛깔에 가공된 지식의 외피가 덧씌워진 피의 박물학. 물론, 그걸 두고 새로운 문화사의 담론, 확장된 표면들끼리의 기민한 네트워킹이라고 한다면 별 할 말은 없다. 그걸 이 책의 장점이라고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강정 igguas@libro.co.kr/리브로)
by www.libro.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