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징비록 |  | |
| 밑줄 그어가며 읽었어야 했거늘……
안동유림에는 약 200년에 걸쳐 ‘병호시비’라는 것이 있었다. 병호시비는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간의 시비라는 말로 누가 퇴계 이황의 첫째가는 제자인가를 놓고 벌인 후학들간의 경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호계서원에 퇴계를 모시는 과정에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중 누구를 서열이 높은 왼쪽에 모시는가를 두고 양쪽의 의견이 엇갈렸다. 서애파는 벼슬을, 학봉파는 연배를 내세워 서로가 퇴계의 수제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양쪽은 타협을 보지 못하고, 서애파가 병산서원을 따로 세워 독립해 나가는 걸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임진왜란을 겪은 두 사람은 당시에도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군무(軍務)를 총괄하던 도체찰사로서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가감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유성룡은 왜란 당시 평양까지 피난가는 선조를 호종하면서 군무를 지휘하고 조정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 반면 학봉은 영남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전쟁 초기에 전사하고 만다. 특히 학봉은 일본에 통신사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을 일으킬 위인이 아니다”라는 잘못된 보고를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학봉은 당시 자신을 책망하는 서애에게 “나도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그리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학봉이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더라면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서애는 이순신과도 인연이 깊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에 의해 중용됐다. 유성룡은「징비록」곳곳에 이순신의 승리를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도 기술해 놓았다. 흡사 삼국지의 관우를 연상시킨다.
“이순신이 전투하던 때의 일이다. 앞서 싸움을 독려하던 그가 총알을 맞았다. 피가 어깨에서 발꿈치까지 흘러 내렸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뒤에야 비로고 박힌 총알을 빼내었다. 칼로 살을 가르고, 5, 6cm나 박힌 총알을 빼내는 동안 곁에서 보던 사람들의 얼굴은 까맣게 변했지만 그는 태연히 말하고 웃는 모습이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p. 122)”
「징비록」은 과거를 기록한 책이지만 서애의 메시지는 미래에 맞추어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이를 막아야 할 무관들은 도망치기에 바빴고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도 힘없이 무너졌다. 조정은 그 와중에서도 당파싸움으로 시끄러웠다. 각 도의 관찰사부터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 가족들을 데리고 여기저기로 숨어들었고, ‘나라님’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의 해전에서의 승리와 의병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역사를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서애는 조선이 왜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걸 기적이라고 여기며 후환에 대비하고자 이 저술을 남겼던 것이다.
서애는 도체찰사로서 피난길에서 만난 관리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한편 자신의 책임도 통감한다. 일본의 국력을 얕잡아 보고 안이하게 대처한 점, 그간의 국방을 너무 소홀히 한 점 등을 ‘한탄조’로 후회한다. 패배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피난길을 걱정하고, 명나라만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고 때론 화도 나지만, 이순신이나 다른 인재들을 적극 천거하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서애라는 인물이 조정에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교차하게 된다. 패배하고 도망쳐 온 장군들을 화를 꾹 누르면서 독려하는 모습을 보면 당시 서애가 겪었을 ‘고충’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징비록」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철저한 준비로 또다시 이런 치욕을 당해서는 안된다.’. 당연히 이 책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가에서 ‘올해의 책’으로 지정해 적극 보급했어야 했다. 최소한 조정의 관리들만큼은 밑줄을 그어가며 정독했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차린 조선의 지배층과 조정 대신들은 그리 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이라는 국치를 또 한번 겪게 된다. 서애는 지하에서 이 모습을 보고 “오호 통재라!”를 외쳤을 것임에 분명하다. (박수호 psh4039@libro.co.kr/리브로)
by www.libro.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