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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도의 길 |  | |
| 23년을 재상으로 버틴 ‘행정의 달인’
이성계가 고려를 패망시키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했을 때, 고려의 선비들은 세 부류로 갈렸다. 삼봉 정도전이나 조준, 남효생 등 일각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도와 건국공신이 된 반면, 포은 정몽주 등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와는 달리 길재, 조윤처럼 ‘제3의 길’로 은거를 택한 부류도 있었다. 태조가 인재등용 차원에서 여러 번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끝내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거부의 변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었다. 선비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나라가 안녹산의 난으로 휘청거리고 수많은 절도사들이 난립했던 5대 10국 시절 활약한 재상 풍도. 포은이나 길재 등은 풍도에 야유를 퍼부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무려 5왕조 8성씨 11군주를 모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나라 문인인 사마광, 구양수는 “풍도가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씨를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 지나가는 일과 매한가지다.” “숱한 왕조와 거란을 번갈아 섬겨 온 풍도가 스스로 그동안 받았던 관직을 영광으로 여기면서, 집안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했다고 말하고 있다”라고 풍도를 비난했다. 그러나 「풍도의 길」의 저자 도나미 마모루는 그렇게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풍도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함께 고려해 본다면, ‘풍도의 길’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5대 10국의 시대는 그야말로 빈번한 정권교체와 쿠데타가 있었던, 난세 중의 난세였다. 당나라가 무너진 후 후진, 후량, 후당, 후한, 거란 등이 잇달아 흥망을 거듭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의 주역은 ‘힘’을 가진 무관들이었다. 풍도 같은 문신들은 이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무관들은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있던 문신들을 우대했고,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려고 했다. 이들에게 풍도는 안성맞춤이었다. 이 같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 그는 23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풍도는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입지전적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른 ‘행정의 달인’이었다. 귀족가문이 아닌 평범한 지주 출신의 풍도는 처음 관직에 진출해 당시 절도사 유수광의 무모한 전쟁을 반대하다가 옥에 갇힌 후 그만의 인생 철학을 만든다. 즉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 “매사에 실무를 중시한다”가 그것이다. 이 세 문장이야 말로 ‘풍도의 길’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가 난세 중의 난세를 별 탈 없이 재상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 세 문장에 모두 들어있다. 지금이야 이런 철학이 ‘대중화’되긴 했지만, 풍도가 살던 시절에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저자가 풍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업적 때문이다. 단지 양지만을 쫓으면서 권력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많은 일을 해왔던 것이다. 실제 업적으로 보자면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는 말이 허언만은 아니었다. 공자의 묘를 복원한 일이나, 경전을 널리 보급한 일, 거란의 대학살을 최소화한 일 등은 무관들의 시대에 풍도 같은 ‘온건한’ 재상이 없었다면 이뤄지기 힘든 일이었다. 이것을 고려한다면 그를 단순히 ‘변절자’ ‘배신자’라고 비난할 수만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나라에도 살아온 길만을 보자면 풍도와 유사한 ‘노정객’들이 꽤 많다. 이 분들이 말해왔던 자신들의 ‘철학’도 풍도와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이 분들이 풍도가 지녔던 다른 미덕들, 예컨대 관대한 인격, 청렴결백, 합리적인 판단능력 등을 갖추었는지는 조금 회의적이다. 여하튼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풍도의 길’은 여전히 논쟁중이다. (박수호 psh4039@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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