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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모사의 눈부심 |  | |
| 눈부신 살육과 검은 욕망의 서사시
「살모사의 눈부심」은 눈부신 어둠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표현하는 장중한 어둠은 빛이 사라진 인간 영혼의 깊은 구멍 속에서 거꾸로 빛을 낸다. 어둠 속에서 마주친 어둠보다 더 어두운 빛. 그걸 바라보는 건 눈부시다. 그리고 그 눈부심은 끔찍하다. 스멀스멀 감겨오는 전율과 광기. 위험하지만 피할 수 없는, 달큰한 독배와도 같은 소설.
17세기 오스만 제국. 터키 콘스탄티노플의 왕궁에선 권좌를 얻기 위한 형제들 간의 암투와 살육이 끊이지 않는다. 이 소설은 술탄의 후궁들이 모여있는 ‘하렘’을 배경으로 인간 욕망의 처절한 현장들을 속도감있게 펼쳐 보인다. 화자는 ‘하렘’의 후궁들을 관리하는 흑인 노예 슐레이만이다. 어린 시절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팔려와 거세를 당한 그는 술탄의 충직한 하인으로서 엄청난 권세를 누린다. 그의 임무는 후궁들을 관리하는 일이다. 물론, 거세당한 그가 그녀들을 육체적으로 취하는 건 불가능하다(거세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슐레이만의 치명적인 육체의 공동은 그러나 모든 후궁들을 자신의 욕망 속에 고스란히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과도 같다. 슐레이만이 끝없이 되뇌는 자신의 이중성과 간교함 역시 그 블랙홀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후궁들은 슐레이만에게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느낀다. 그에게 잘못 보이면 술탄의 영예로운 간택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술탄의 간택을 받지 못한 후궁들은 영원히 처녀로 남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슐레이만은 왕궁 안의 모든 일들을 꿰뚫고 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술탄의 가장 충직한 하인으로 자리잡은 그에게 왕궁이란 그 자신 영혼의 해부도와도 같다. 그는 왕궁의 얽키고 설키는 암투 속에서 자신을 보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육체의 부대낌으로 체득한 그만의 생존전략이다. 게다가 그는 검은 피부를 지녔다. 아무리 깊고 어두운 음모나 욕망 속에 자신을 숨겨도 그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낮게 읖조리고 가슴을 크게 부풀려 그 소리를 왕궁 밖으로 새어나오게 할 뿐이다. 우리가 읽는 소설은 바로 그 왕궁 밖으로 새어나온 슐레이만의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검은 얼굴을 더 검게 만들어 내부의 진한 욕망을 뒤집어 보이는 마술적 언술. 터키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작곡가, 영화감독인 쥴퓨 리반엘리는 이 검은 페르소나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어두운 역사를 더듬는다. 참혹한 애욕과 검은 에로티시즘으로 점철된 그 역사는 그러나 한 제국의 특정한 음화를 보여주는 걸 넘어 인간 보편의 어두운 욕망의 전모를 강렬하게 재현하고 있다.
리반엘리는 피로 얼룩진 제국의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이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테면 이 소설의 주제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이 작품을 ‘어둠과 밝음 사이의 소설’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작가의 변에 하나를 더 덧붙이자면, 「살모사의 눈부심」은 ‘현실과 환상 사이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와는 또다른 마술이 이 소설엔 있다. 물론, 그런 차이는 지정학적 배경과 역사의 차이에 크게 기인한다. 인물들이 난관에 처할 때마다 심심찮게 되풀이하는 코란 구절들은 이 작품의 독특한 주술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작품으로 리반엘리는 ‘발칸문학상’을 수상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이 상은 매년 발칸지역 모든 국가의 작품들을 선별해 가장 우수한 작품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굉장한 속도감으로 술술 읽히지만, 리반엘리는 이 작품을 7년 동안 구상해서 3년 간 썼다고 한다. 그 만큼 이 작품엔 사료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거기에 흥미진진한 픽션을 가미한 흔적이 역력하다. 물론, 압권은 생생한 묘사와 섬세한 심리의 추이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전개되는 리반엘리의 문장이다. 욕망과 시기, 암투하는 영혼의 어두운 배면을 도려내는 그의 문장은 술탄이 휘두르는 잔혹한 칼끝처럼 선연하게 빛난다. 비록 번역본이긴 하지만, 같은 우랄 알타이어계의 문장구조를 가진 터키어를 이만큼 설득력 있게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원작자 특유의 섬세하고 기민한 필력이 손상됐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도 좋을 듯하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영화‘에덴의 동쪽’의 감독 엘리아 카잔의 발문, 그리고 리반엘리의 대담까지 실려있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헌사와 고백들은 마치 오래 부셨던 눈을 닦고 천천히 소설 바깥으로 나가라는, 그리하여 소설의 오랜 감동을 두고두고 곰씹으라는 대가들의 온화한 충언처럼 여겨진다. (강정 igguas@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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