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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신포도 밑에는 여우가 있다 |  | |
|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욕망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소설가 최수철 씨를 우연히 뵌 적이 있다. 92년 12월, 문학사상사에서 주최했던 시상식에서 당시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말은 잘 못한다며 써 온 당선소감을 읽어 나갔다.
이 자리가 끝난 후, 작가에 대한 약간의 경외감을 가지고 수상작품인 「얼음의 도가니」를 읽어보려 했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나중을 기약하면서 이내 책을 덮어야 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에게 그의 소설들은 진중한 주제 의식과 형식적인 난해함 때문에 결코 읽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새로운 작품집인 「모든 신포도에는 여우가 있다」는 그의 예전 소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최수철´이 맞을까, 를 몇 번이고 확인할 정도로 33편의 이야기는 신선함과 재미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뒤통수를 치게 만드는 기지와 평범하지만 감동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우선 그의 소설의 가장 큰 재치는 제목에서부터 나온다. ´모든 신포도에는 여우가 있다´는 전체 소설집의 제목이면서 그의 소설집 속의 한 짧은 소설의 제목이고, ´여우와 신포도´라는 이솝우화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는 우화에서 출발하여, 주인공이자 여행사 대리인 30대 중반의 ´관조´씨가 욕망과 유혹, 자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동감하게 되는 일련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포도를 생각했을 때 누구나 입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자기 욕망에 끊임없이 집착해온 ´관조´씨의 모습은 포도에를 갈망하는 여우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 밑에는 무수히 많은 온갖 종류의 여우들이 낭패한 표정, 움츠린 어깨, 음울한 몸짓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굶주린 여우들이 들끓는 포도밭에 들어와 있었다. 순간, 그는 그 자리에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모든 신 포도 밑에는 여우가 있다´ p.97)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을 이끌어 가는 인물인 소설가 ´공근´ 씨와 이미 언급한 ´관조´씨가 현실을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들이 만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 속의 인물들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한 번은 만났음직한, 혹은 가까이에 지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인물이자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소설 속의 인물들-임금 왕에 벼슬 경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지만 ´이름 값도 못하는 남자´ 조왕경(´이름값´)이나 자신을 중고차로 생각하는 허과장(´그래도 지구는 돈다´), 상대방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먼저 연구하고 그것을 통해 사기를 치는 김창수(´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하여´), 이집트 여행길에 람세스 2세니, 아크나톤이니 하는 파라오의 이름을 쓰면서 즐거워하는 여행객들(´떠도는 이름들´)-은 우리 자신의 가식적이면서 때로는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작가 최수철의 새로운 시도를 이해하기 위해 놓치지 않아야 하는 인물은 소설가 ´공근´씨이다.
소설을 통하여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해왔으나, 여전히 자신의 글과 현실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현실은 점점 더 그의 글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강건너 불´, p.129)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사가 결국 선택의 문제´이고 ´살아가는 매순간에 선택을 하는 행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머리 속에 든 나방 한 마리´, p.98)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선택의 양 축을 끊임없이 보여주듯이, 작가 또한 이제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설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것이 설사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라도 그의 소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제 그는 10여 년 전에 그랬듯이 쓴 글을 단지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서 독자들을 향해 ´모든 신포도 속에는 여우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고 있다. 편하게 건네는 그의 이야기 속으로, 그 변화가 너무도 아름다운 작가 최수철의 소설 세계로 한 번 빠져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장재진/리브로 명예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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