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첫사랑 |  | |
| 모든 생은 부랑자의 그것이다
「첫사랑」은 모두 네 개의 단편으로 되어 있다. 〈첫사랑〉, 〈추방자〉, 〈진정제〉, 〈끝〉은 서로 은근슬쩍 연결되고 있다. 등장인물은 한결같이 어딘가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 신세다. 무엇이 자신을 거리로 내몰았고, 더럽고 추한 거리의 삶을 살게 했는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애초에 그런 이유란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혹은 삶 자체가 부랑자적 조건에 처해있다는 듯이. 게다가 자신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주머니에는 얼마의 돈이 있는지 조차 독자들은 모른다. 이상한 일이지만 뭐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머리 속 자기 의식 속에서 말들을 주고받으며,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어째서 베케트가 그런 소설 쓰기를 했는지 궁금하다. 이 소설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쓰여진 것들인데, 베케트는 희곡의 경우 대부분 모국어인 영문으로 썼지만 소설은 초기작들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로 썼다고 한다. 두 언어에 대해 기초밖에 모르지만 왠지 영어로는 이런 애매모호하고 멜랑콜리한 내용은 잘 나올 수 없을 것만 같다. 기껏해야 무지하게 딱딱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다. 설마 이런 이유에서 불어로 소설을 썼을 리는 없겠지. 책의 앞머리 말을 인용하자면 시, 희곡, 라디오, 시나리오 등을 썼던 베케트에게 소설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한다. 독일의 게슈타포에게 쫓기면서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쓰기 시작했고, 또 너무나 고통스러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도 소설이라는 장르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주르륵 써내려 갔을 수가 있을까. 아주 드물게, 생각났다는 듯이 행갈이를 하고 문장이 도대체 어디서 끝나는 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쉼표 투성이의 글들. 그것으로 쓰여진 이야기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카오스의 혼돈에서 프랙탈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소설은 주인공의 불완전한 생각들, 연결되지 않고 무의식 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단어들을 그대로 문장으로 전달하는 듯 하다. 문장과 인물들, 플롯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설의 문법에 비교해 보자면 무엇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그 분열증적 세계에서 카오스의 패턴인 프랙탈 이미지를 본다. 카오스의 불규칙 세계를 분석하고 볼 수 있게 해주는 프랙탈 이미지는 카오스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무의미의 극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생성 규칙이 있고 반복이 있고 정보가 들어 있고 조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느끼게 된다.
삶은 그것이 부랑자의 것이든, 갑부의 것이든, 앞이 뻔히 내다보이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현대인의 것이든 알 수 없는 무질서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놈의 팍팍한 생을 사는 이유가 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등의 질문으로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질문을 통해 결핍을 채우려는 안간힘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베케트의 소설을 통해 나타난 프랙탈 이미지를 내가 설명해줄 수는 없다. 나로서는 우리 모두가 타인에게 납득될 수 없는 욕망들과 통용되지 않는 자기만의 법칙으로 줄거리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뿐. 프랙탈 이미지처럼 우리가 삶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나한테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 그것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P.54)
베케트의 소설집은 무엇에 이르지 못한 결핍으로부터 오히려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향해 나가는 여정이다. 일상적인 삶의 반복은 결핍을 보충하려는 것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그 아무 것도 아님의 반복에 이르러 진정 새로움이 시작될 수도 있겠다. 이것이 부랑자의 인생이다. 어쩌면 삶을 자기 통제하에 넣고 싶어하고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부랑자의 카오스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언제 어디서 변화가 닥칠지 모르는 불연속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다. 나의 사고는 두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애초에 첫사랑에 실패하면서 뭔가 어긋난 존재들이다.
“나는 내가 할 뻔했던 이야기, 말하자면 끝낼 용기도 그렇다고 계속할 힘도 없으면서 할 뻔했던, 내 삶을 본뜬 그 이야기를, 섭섭함도 없이 어렴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P.155)(김은선 kong@libro.co.kr/리브로)
by 리브로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