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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레의 꿈_ |  | |
| 나는 엄동설한 눈꽃이 숭어리숭어리 여문 언덕배기 자그마한 예배당, 함석 지붕의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는 털털한 잠바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교인들의 농사일을 거드느라 출타가 잦으셨
고 어머니는 아홉 시간의 대수술을 받으신 뒤로 방 안에 꼼짝없이 드러누워만 계셨다. 다운증후군이었던
버버리 형이랑 나는 누나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어머니 시중을 들어야
했다. “아가! 일으켜다오.” 어머니 손이 허공을 저으면 링거 주사액 냄새가 가득한 방으로 어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토방이나 마당에서 노는 일이 잦았다. 토방에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했고 학교를 다니지 못
한 형은 어린왕자 행성에서나 소통될 외계인 글씨로 내 교과서를 더럽혔다. 빼앗으면 목을 놓고 우니까
큰누나 방 빼닫이에서 분홍 편지지를 도둑질해 사정사정하고 교과서랑 바꿔야 했다. 둘이 엎드려 무엇인
가를 쓰고 그리고 그러다가 등을 대고 누우면 토방 한쪽 회벽에 밀레의 작품 만종, 복사본 액자가 보였
다. 여고에서 배운 솜씨로 큰누나가 수를 놓은 만종도 저 건너편에 걸려 있었다. 두 개의 만종을 바라보
고 토방에 누웠다가 잠이 들고는 했다. 꿈속에서 예배당을 보았고 종소리를 들었고 저물 녘 들길을 걸어
다정히 돌아오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고 동구 밖에서 엉켜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네친구들 웅성
거림도 들었다. 눈을 떠 보면 초저녁이었고 내가 돌봐야 했던 형은 어느 틈에 일어나 집을 나가고 없어 형
을 찾으러 저수지 둑이며 마을 골목들을 뒤져야 했다.
종은 평온했다. 그래서 만종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온한 감사의 저녁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
른다. 나는 만종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크레파스와 물감은 자주 동이 났다. 중학교 졸업 때까지 미술
반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큰 상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대를 다니
다 학비며 생활비 때문에 휴학을 하고 내려 온 막내누나가 온 식구들 앞에서 엉엉 소리내어 우는 것을 보
고는 미술도구를 모두 다락에 집어넣어 버렸다.
많은 날들이 구름처럼 강물처럼 사랑처럼 흘러갔고 나는 시방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시골 교회 예배당에
서 목사가 되어 살고 있다. 전라남도 땅끝 강진에서 만종을 울리며 농민들의 벗이 되어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우렁더우렁 지내는 이야기를 모아 몇 권의 책을 썼고 그 가운데 밀레의 만종을 생각하고 제목
을 붙인 책 <종소리>를 지난겨울 펴내기도 했다.
무슨 인연일까. 이제야 나는 다락에서 미술 도구를 다시 꺼내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토방에는 밀레의 만
종을 구해 걸어 놓았고 화방에 가서 종이도 넉넉히 사서 쟁여 둔 터다. 톡톡한 방해꾼(?)이었지만 함께 토
방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던 버버리 형도 세상에 없고 성탄절마다 머리맡에 수채화 물감을 놓아 주셨던 아
버지도 이제는 이 세상 분이 아니다. 나에게 남은 건 그림을 그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 하나뿐. 내 업인 일
주일 한 편의 설교, 텃밭을 일구는 일, 그리고 글을 쓰는 일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그 못지않게 그림도 열
심을 내어 그릴 각오다. 미술대회에 출품할 생각도 미대에 진학할 생각도 없으니까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유명하고 훌륭한 화가보다는 무명하고 행복한 화가가 나는 되고 싶다.
[월간좋은친구/ 임의진 님 | 남녘교회 목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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