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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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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왜 남자야? |  | |
| [나성희님]
우리 집은 분당 효자촌 연립주택 단지 안에 있다. 연립주택 단지에서는 여유 공간이라고 해봐야, 양옆에
늘어선 차들을 건드리지 않고 겨우 차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통로와 나뭇가지가 어깨를 스치는
보도, 그리고 벤치 두어 개면 다 가려지는 조그마한 공원이 전부이다. 그래도 지금은 꽃밭과 조경석 사이
마다 철쭉이 한창이다. 며칠 전,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는 나는 교열한
교정쇄를 갖다 주러 직업능력개발원에 갔었는데, 담당 연구원이 검토해 보다가 옆자리에 있는 동료까지
불러 가며 아주 만족해하기에 뿌듯함과 감사를 온 마음으로 느끼고 있던 터였다. 단지 안으로 들어오니,
관리소장과 경비원, 전기기사 아저씨까지 나서서 전정가위를 들고 나무들을 다듬고 있었다. 관리소장에
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작은 공원 옆에 어떤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듯한 의자에 앉아 기다란 전
정가위를 갈고 계신 것이 보였다. 숫돌도 종류별로 늘어놓고 일하시는 품이 아마추어 같지는 않았다. 그
분의 하루 벌이에 도움이 될까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여쭈어 보았다. “부엌칼도 갈아 주시나요?” 할아버
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셨다. 낯빛은 맑았지만 굵게 파인 주름과 말투로 보아 연세가 지긋한 분이
란 걸 알 수 있었다. “가져와. 돈은 안 받어.” 나는 얼른 집으로 들어와 갈아야 할 칼들을 찾고 지갑을 챙
기고 커피를 끓여 보온병에 담아 가지고 그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다시 갔다. 할아버지는 들통을 가리
키며 물이 부족하니 좀 채워 달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지하실에서나 다 물을 받을 수 있어. 됴오기, 수도
꼭지 보이디? 게서 받으라우. 기 옆이 우리 딥이야.” 할아버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나를 가만히 보
시더니 굵은 숫돌에 칼을 갈기 시작하면서 물으셨다. “아이가 몇이오?” “딸 하나, 아들 하나, 둘이에요.”
“아딕 어리갔디? 아이들 과외 뭐하러 시켜요? 여기저기 학원 보내지 말고 놀게 해요. 대신, 한자(漢字)만
은 하루 한 글자씩 가르쳐 주라우. 아이들에게 한자를 배우게 하면 문리를 일찍 터득하게 돼 스스로 공부
하는 재미를 알게 되는기야. 우리 아이들도 다 그렇게 공부시켰어. 지금은 모두 자기 자리에서 성공했잖
아? 7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국내외 대학의 교수들이고 기업체의 사장이고 컴퓨터 기술자고 그래!” 때때
로 내젓는 손이 노인답지 않게 참 하얗다고 느낀 순간, 할아버지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
셨다. “나는 양과자 기술자였어. 젊었을 땐 내 가게를 갖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물건이 남았지만 난
늘 새로운 것들을 개발해서 팔았기 땜에 더 비싸게 받으면서도 재고가 없었어.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해
가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종사하는 일에 모두 발전적이야. 그리고 기술은 어떤 세상에서든 아주 중
요해. 내 나이 이제 아흔다섯인데, 칼 가는 기술을 지금도 써먹을 수 있잖아?” “아흔다섯이요?” “거럼, 우
리 마누란 아흔이야. 지금 나는 마누라랑 둘이 살어. 그 사람, 이젠 문밖 출입을 못해. 내가 다 해 먹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러지. 마누라 죽으면 나도 곧 따라갈거야…” “두 분만 따로 사신단 말예요?” “응, 모
두들 내보냈어. 자식들이 결혼할 때도 스스로 짝을 찾으라구 했어. 즈이들이 함께 살거니까 즈들 서로 좋
으면 되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게 아니지.” 할아버지가 세번째 칼을 고운 숫돌에 갈아 물에 헹구고 치
켜들었다. 칼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날카로운 반사광이 할아버지 기억 속의 어두운 곳을 헤집었을까? “…
전쟁, 그건, 사람으로선 못할 짓이야. 나라의 힘을 길러서 평화를 지켜야 해. 나는 2차대전, 대동아전쟁,
육이오까지 다섯 번이나 전쟁터에 나갔댔어…” 할아버지는 그 칼을 내려놓고 무딘 칼을 집어들었다. 할
아버지의 음성이 다시 평온해졌다. “나는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건 뭐든 했어. 만들기, 고치기, 외국어 배
우기. 음식도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다 하지. 지금도 다 해. 할 일이 없으면 하루해가 길어지고 삶에 의미
가 없어지는거야, 쓸데없는 공상만 생기고. 죽을 날 가까운 사람들에겐 그게 제일 무서운거거든. 시간이
있을 때 배우리라 생각하지 말고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스스로 배우라우. 나는, 일본어는 우리말보
다 더 잘 하고, 중국어도 약간, 러시아어도 조금 하지. 미국도 여러 번 갔었어.” 할아버지가 틈틈이 커피
를 드시고 손짓을 해 가며 말씀하시느라 시간이 많이 갔고, 쪼그리고 앉은 나는 다리가 저려왔지만 함부
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갈아 주신 칼을 받아 들고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날을 손톱에 대어 미
끄러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할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만류하셨다. “내가 가
진 것으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기쁨을 빼앗을거요? 잘 드는 칼 가지고 살림 잘 해요!” 용돈이라도 하시라
는 ‘부탁’도 소용이 없어, 할 수 없이 “저는 조오기 맨 끝 집에 살아요” 하며, 가져온 신문지에 날이 잘 선
칼들을 쌌다. 내가 죄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되풀이하며 일어서는데 할아버지가 따
뜻한 눈빛으로 덧붙이셨다. “말이 통하는 젊은이랑 얘기하니 기분이 좋아요.” 말이 통하는 젊은이? 하지
만, 나는 그렇게 젊지도 않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동안 내가 한 말은 고작 몇 차례 질문한 것과, “네
에” “그러셨어요?” “정말 그렇군요” 하고 맞장구친 것이 전부였다.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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