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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여름밤의 꿈처럼 |  | |
| 새벽녘 은행나무사이를 걷고 있자니 부지런한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 담고 계시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다가 아파트주변에 무성한 은행나무에 열매가 열린 것도 눈치 못채고 그 은행
이 떨어져 뒹구는 것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가을을 맞고 말았다.
그제사 나뭇잎을 올려다보니 서늘한 바람은 서늘한 소리로 어서 황금빛 향연을 준비하라고 잎새들의
감성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쏴아하는 함성과 함께 부산하게 가을빛 노란옷을 준비하고
있었다.
올 구정에 시아버님을 아산의 선산에 묻던 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려 슬픔조차도 한폭의 겨울영화처럼
아름다웠었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 아버님의 모습과 함께 엊그제 일로 생각되어지는데 어느
새 계절은 세 번이 바뀌었으니 세월의 빠름을 절감치 않을 수 없다.
87세 연세가 살아계실 땐 장수하신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천국으로 이사가셔서 그 길던 일생도 되돌아
보니 한 여름밤 꿈처럼 아련하고 짧기만 하다. 내게 남겨진 시아버지의 느낌은 따스함이며 편안함이다.
그리고 시집와서 24년 보여주신 그 모습은 부모로서, 사람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본받고 싶은 인생의
스승이시다. 아버님은 세상적으로 자랑할 부귀와 영화도 누려보지 못하셨고, 성공적인 삶을 사신 것도
아니지만, 가족들에게 사랑이라는 무형의 값진 유산을 남겨주고 떠나신 진정한 승리자시다.
시할아버지께서는 아버님이 어릴 때 만주로, 러시아로 독립운동을 다니시느라 집에 계신 날이 거의
없으셨다고 한다. 아버님의 어머님도 이화여전을 나와 일본군에게 항거하다 결국 태중에 둘째를 임신
한 상태로 옥중전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때 아버님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셨다.
그후 새 어머니 밑에서 배다른 형제들과 차별대우를 받은 아버님. 많은 아픔을 가지신 그 과거로 인해
가정과 가족을 유난히 아끼시고 당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싶어하신 것이 아니었나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아버님이 3년전 추석즈음, 백내장 수술을 받으시러 병원에 입원하셨었다. 수술이 잘 끝나 입원실
침대에서 주무시던 아버님, 그 밑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중년아들을 깨우기 안스러워 혼자 더듬더듬
화장실을 가시려다 넘어지신 것이 뇌출혈을 일으켰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중환자실을 드나들며 힘든
투병을 하셨지만, 결국은 대소변을 며느리들 손에 맡기신 채 누워서 삼 년 여를 지내시다 돌아가시게
되었다.
수시로 입원하시면 형님과 내가(다른 형제들은 다들 직장생활이나 아이가 어렸기에) 번갈아 병실을
지켰고, 퇴원을 하시면 당번을 정해 딸과 며느리들이 돌아가며 하루종일 아버님곁을 지켰다.
사람들은 시아버지 병수발이 얼마나 힘들었냐고 말하지만 난 그 삼 년의 시간이 아버님과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나눈 귀한 시간으로 소중하기만하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아버님을 생각해도 뒤늦은
후회가 없다.
그 삼 년간 아버님과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그 애틋한 감정, 아프지 않으시면 그럴 수 없었던 그 많은
스킨쉽들, 그것은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아버님은 늘 그 추억 속에 살아 계시다. 아프신 속에서도
짜증 한 번 안내시던 아버지, 우리들 불편할까 늘 배려하며 참으시던 그 인내, 섭섭한 일들도 속으로
삼키시고 내색 한 번 안하시던 너그러운 마음, 뵐 때마다 기다렸다는듯 반갑게 맞으시며 웃는 모습,
아버님이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본다.
“아니, 괜찮아.” “다 좋아. 이만하면 난 행복한 사람이다.” “네가 제일 좋고 이쁘지.(누구에게나)”
“그냥. 속상해하지 말구 되어지는 대로 살아라.” “절대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조금씩 손해
보면서 도와가면서 살아라.” 말이 없으셨지만 그 분의 눈빛은 사랑을 담고 계시다.
언젠가 아버님 병상을 지키던 둘째 사위가 “아버님의 눈을 보면 이 분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
구나 하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져”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아버님의 모습은 말만 무화과 나
뭇잎처럼 무성하고 사랑의 실행은 없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부끄럽게 하고 진정한 사랑의 승리자로
내가 닮고 싶은 사람 1호이기도 하다. ▣
김영미/월간 신앙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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