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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 |  | |
| 장 콕토를 읽으며 장국영을 생각한다
젊은 시절부터 동성애 성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던 시인 장 콕토는 46살이던 1936년, 당시 애인이었던 마르셀 킬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는다. 쥘 베른 탄생 100주년을 맞아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실제로 재현해보자는 내용이었는데, 심각한 아편중독 탓에 창작의욕이 현저하게 감퇴된 상태였던 장 콕토는 20살 연하의 이 용감한 애인의 제안에 기꺼이 응한다. 마침 ‘파리-수아르’의 편집장 장 프루보스트가 가는 곳마다 현지 소식을 글로 써서 보내 달라는 조건으로 둘의 여행의 돕는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1936년 3월 29일, 장 콕토의 여정이 시작된다.
목적지와 이동경로, 이동시간 등에 대한 꼼꼼한 계산이 전제돼 있더라도 여행은 늘 예기치 못한 우연과 맞닥뜨리는 법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시간계획에 큰 오차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연은 오히려 여행 중에 발견하는 흔치않은 보석이 될 수 있다. 낯선 곳과 마주치면서 느끼게되는 두려움과 흥분이 감성의 폭을 그만큼 넓고 풍성하게 확장시켜 주기 때문이다. 물 흐르듯 줄줄 써내려 간 문장과 과감한 시적 비약이 돋보이는 「장 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세계를 자신만의 상상적인 무대공간으로 바꾸는 시인 특유의 환상과 열정이 수려하게 녹아있다. 시인 장 콕토는 이 책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로마, 자신만의 중국, 자신만의 일본을 건설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 콕토는 ‘사랑하기, 서서 잠들기, 기적을 기다리기’를 자신의 유일한 ‘정치(政治)’라고 말한다. 아닌게아니라 이 책은 실제로 배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써낸 기행문임에도 극단적인 탐미주의에 빠진 시인이 ‘서서 잠’든 채 기록한 내면일기로 읽힌다. 거기에 환전, 운반 등의 실질적인 흥정을 주도했던 ‘아름다운 몸종’ 킬에 의해 자극 받은 감수성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편과 관능, 낯선 신비에 취해 거의 자동기술적으로 펼쳐낸 문장들은 세계의 도시들을 세계부도에 명시된 정보와는 무관한 새로운 꿈의 무대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내 여행 방식을 여러분에게 추천해 볼까? 일단 여행지의 사물과 더불어 지내라. 그 사물들에 시선을 던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내 경우에는 그런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법이 없다. 그저 사진을 찍듯 그냥 쳐다보는 것으로 그만이다. 내 머릿속 암실은 그런 영상들로 마구 어지러져 있고, 집에 돌아온 후에야 필름을 현상하듯 하나하나 떠올려 보는 것이다.”(P.36)
시인 외에도 안무가, 극작가, 평론가, 영화감독, 무대장치가, 심지어 재즈연주자이기도 했을 만큼 다방면의 재주를 지녔던 장 콕토는 어떤 역사적인 기록들이 전해주는 세계의 정보들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감각과 직관, 그리고 열정이 자극하는 시적인 환상만을 좇으며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온 문장들은 생생한 현장감과 더불어 장 콕토의 예술적 환상 속에서 편집되고 재구성된 새로운 공간을 형성한다. 옮긴이에 말마따나 그건 ‘연출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이었던 셈이다.
쥘 베른의 소설에서 착상한 여정인 만큼, 장 콕토와 킬은 영국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그의 충직한 하인 파스파르투(책에서 장 콕토는 킬을 ‘파스파르투’라고 부른다)의 역할을 그대로 재현한다. 물론 사소한 에피소드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행의 동기와 목적은 오로지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그대로 실천하는 데 있었다. 쥘 베른의 소설 속 이야기를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실제의 삶에서 연기해내는 것. 그건 사랑과 예술, 그리고 삶이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루는 하나의 연극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세계의 도시들이 하나의 정교한 연극무대처럼 느껴지는 건 바로 그런 장 콕토의 타고난 예술적 연출력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일평생 거의 모든 예술장르를 건드렸던 장 콕토의 인생에서 이만큼 예외적으로 부각될만한 드라마가 또 있을까?
장 콕토의 글을 읽으며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국영을 떠올렸다. 장국영이 일기라도 남겼으면 이런 어조였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러면서 장국영의 자살이 아직도 현실 아닌 영화의 한 장면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의 자살은 자신의 사랑과 삶, 그리고 영화 속의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일치시키고자 하는 ‘영원한 젊은이’의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열망 탓이 아니었을까. 비록 장 콕토가 장국영과 비슷한 나이에 역시 비슷한 나이의 애인과 함께 지구를 한바퀴 돌았던 반면, 장국영은 애인을 두고 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사라졌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이게 오버라면, 내 성(性)이 바뀔 때까지라도 오버하겠다.
by 리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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