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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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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람이와 할아버지 (안영옥) |  | |
| 학년 1반 교실입니다. 햇조각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방긋방긋 웃고 있습니다. 교실은 왁자지껄합니다. 장난치며 뛰어 다니는 어린이, 햇살에 돋보기를 비추어 공책을 태우는 어린이, 빗자루를 가지고 검도를 하는 어린이 등등 온통 수라장입니다.
한참 후에야 선생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여러분, 점심 시간입니다. 질서를 지켜 조용히 급식실로 가세요.˝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이 채 긑나기도 전에 후닥닥 달려갑니다. 아무리 뛰지말라 타일렀어도 급식 먹으러 갈 때만큼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먼저 가려고 야단법석입니다. 선생님은 그래도 조무래기들이 귀여운지 뒤돌아서서 쿡쿡 웃으십니다. 그런데 급식실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날따라 하필이면 도토리묵이 반찬으로 나왔습니다.
창식이는 마주 앉은 다람이의 식판에 도토리묵을 건네 주면서 인심을 썼습니다.
˝야, 너 이거 좋아하지. 많이 먹어. 응?˝
다람이는 약간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야, 나도 안 먹어.˝
다람이는 도토리묵을 창식이 식판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창
식이가 표정을 바꾸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야 임마, 다람쥐는 도토릴 먹고 살잖니. 암.˝
창식이는 또 다시 다람이에게 도토리묵을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네모난 묵이 다 으스러졌습니다. 다람이는 눈에 힘을 주고 창식이를 쏘아보았습니다. 하지만 힘센 창식이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얕보듯 웃었습니다. 마침내 화가 치민 다람이는 벌떡 일어나 먹던 식판을 창식이 쪽에 엎어버렸습니다.
˝이 새끼가!˝
둘이는 멱살을 잡고 엎치락뒤치락 뒹굴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영양사 선생님이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밥을 먹다 말고 싸움구경하느라 동그랗게 둘러쌌습니다. 두 사람은 코피가 터지고야 싸움이 끝났습니다.
다람이는 전학 온지 얼마 안되어서 창식이 눈밖에 났습니다. 첫날부터 너는 너무 다부지다, 키가 왜 크다가 말았느냐, 서울 애들은 너처럼 그렇게 다 안경잡이들이냐 등등 호기심 반, 시기심 반으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발표를 조금만 잘해도 잘난 척 한다는 둥 다람이의 기분을 사사건건 거슬리게 했습니다. 전한 오자마자 창식이가 지어준 별명만 해도 수두룩 합니다.
이름이 다람이라서 다람쥐, 키다 작다하여 땅꼬마, 서울 애 채곤 얼굴이 까맣다고 깜치 등 기분 나쁜 별명들을 모조리 끌고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들의 별명도 거의 다 창식이가 지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문호는 문어 대가리, 소라는 소똥구리, 보람이는 보리밥, 새롬이는 새똥 등등 아이들마다 독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식이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오락이면 오락 뭐든 잘하는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아이들한테 인기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창식이가 다람이 책상으로 오더니 대뜸,
˝야, 서울 촌놈. 나하고 한 번 붙어 볼래?˝
하는 것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창식이를 한방에 날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사실 다람이는 서울에서 태권도 1단까지 딴 상태였습니다. 그 후로도 다람이에게 도전장이 몇 번 날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람이는 마음이 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별들이 하나 둘 놀러 나온 초저녁, 창식이가 심부름을 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골목을 막 접어들고 있는데 저만치서 다람이가 어떤 할아버지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는 걷는 모습이 몹시 힘들어 보였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괜찮아요.˝
˝어린 것이 애비마저 생이별이라니 이 할애비 맘이 천근 만근이다.˝
˝아이 참 괜찮대두요.˝
˝게다가 매일같이 이 무거운 할애비 가방 들어 나르느라 얼마나
고생이냐.˝
창식이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궁금한 생각 끝에 다람이의 뒤를 밟기로 했습니다. 어둠과 함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조금만 참거라.때가 되면 애비가 우리 다람이부터 데리러 올 게야.˝
˝네.˝
다람이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아빠 생각이 났는지 목이 메이는 소리같았습니다.
´그럼 다람이가 할아버지와 단 둘이서만 산다는 걸까.´
가만히 듣고 있던 창식이 머릿 속에 다람이 처지가 좋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순간 다람이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뜩이나 맘이 좋지 않은데 할아버지는 다람이에게 학교 생활을 물었습니다.
˝그래, 학교는 다닐만 하더냐?˝
˝네, 선생님과 아이들이 다 잘해줘요.˝
여기까지 엿들은 창식이는 낮에 도토리묵 때문에 싸웠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짓궂게 굴었던 지난 일들도 한 가지씩 떠 올랐습니다.
어느새 별들이 빛범벅이 되어 창식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우산을 고치고 돌아온 할아버지는 낡은 가방을 밀쳐 놓았습니다. 할머니가 계실 때는 날마다 가방 속을 말끔히 정리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흙먼지떼가 뒤덮여 엉망입니다. 게다가 복잡한 잡동사니까지 엉켜서 울룩불룩했습니다. 다람이는 피곤에 지친 할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된 하루를 담고 온 가방 속을 깨끗이 정리 했습니다. 비록 허름한 가방이었으나 할아버지의 손길이 묻어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 할머니의 빈 자리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다람이는 본래 아람이와 이란성 쌍둥이입니다. 어느날 아빠는 다람이와 아람이를 각각 친가와 외가로 맡겼습니다. 다람이 엄마는 갑자기 들이닥친 빚더미 때문에 지금까지도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이산가족이 되어 뿔뿔이 흩어진 다람이네 가족은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굳은 의지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서로 버티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씩 잠깐 다녀 가시는 아빠는 엄마의 안부를 차마 묻기도 전에 떠나시곤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한숨마저 날로 늘어 다람이 마음은 늘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와 사는 일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이튿날입니다. 늘 그러듯이 아침은 상쾌합니다. 특히 부족할 것 없는 창식이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축구화를 사기로 엄마와 약속한 날이라 여느때보다도 좋았스빈다. 발빠른 창식이는 한나절을 뛰어 놀다가 잰 걸음으로 엄마를 따라 나섰습니다.
동네 어귀의 간이 장터는 제법 시끌벅적했습니다. 시골 할머니들이 나란히 앉아서 풋풋한 봄을 팔기도 했고, 물좋은 생선도 갖가지 늘여져 있고, 뻥튀기 할아버지까지 앉아서 튀밥불을 지피고 있었습니다.
창식이는 저마다 부산한 시장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물건이 펼쳐져 있는 곳마다 기웃기웃하면서 누군가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옳지, 저기 계시네!˝
엄마는 손바닥만한 자리에서 우산살을 열심히 고치고 있는 할아버지를
가리켰습니다.
˝엄마, 저는 이곳에서 기다릴게요.˝
창식이는 바로 옆인 야구 연습장을 쳐다 보았습니다. 베팅하는 장면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는데 엄마의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식이는 무슨 일
인가 싶어 곧 엄마옆으로 다가갔습니다.
˝도대체 구두를 고치지도 않았다면서 어이다 두고 그렇게 찾는 거에요?˝ 못마땅한 엄마의 짜증 섞인 말이 이어졌습니다.
˝이러니까 평생 길거리에서......˝
엄마는 무슨 말인가를 할려다가 말았습니다.
˝분명히 가방 속에 넣어 뒀는데......˝
난처해진 할아버지는 가방을 수도 없이 뒤졌습니다.
˝아휴 정말 속상해. 맡긴 내가 잘못이지.˝
창식이 엄마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집에 가서 다시 찾아 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창식이 엄마 앞에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창식이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 이 할아버지는 어젯밤......´
그렇습니다. 어젯밤에 본 다람이 할아버지가 분명했습니다. 창식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엄마, 그만 하세요!˝
엄마는 창식이가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 얘가 왜 이래. 모르면 가만 있잖고.˝
영문을 모르는 창식이 엄마는 창식이 말에도 아랑곳 없이 계속 할아버지만 다그쳤습니다.
˝빨리 내 구두나 찾아 내욧!˝
순간, 창식이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바로 할아버지의 등 뒤로 다람이가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식이는 전봇대 뒤로 얼른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다람이는 이미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뒤였습니다.
다람이는 우물쭈물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수 개월 전 아빠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생각하기 싫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람이는 어쩔줄 몰라 하는 창식이의 눈길을 애써 피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제 저녁 일이 생각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요즘 들어 왜 고단하시나 했더니 신발까지 수선하시느라...... 그러면 어제 가방 속에 있었던 구두가......´
다람이는 어젯밤 할아버지의 수선 가방을 정리하던 중에 여자 구두 한 짝이 나오길래 쓰레기인줄 알고 버렸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평소에 워낙 길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잘 주워 오시기 때문에 어제도 그러려니 했던 것입니다.
다람이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부엌문 앞에 있는 쓰레기 봉투를 뒤졌습니다. 음식물과 함께 뒤엉킨 쓰레기가 와르르 쏟아지면서 흰 구두 한짝이 나동그라졌습니다.
다람이는 구두를 깨끗이 닦아 할아버지께로 냅다 뛰었습니다. 하지만 창식이네는 가고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목덜미에 깊게 패인 주름이 두 사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람이의 손에 들린 구두 한 짝을 보시곤 쓴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다음달부터는 방과후 과외 활동에 꼭 등록하거라.˝
그제서야 다람이는 할아버지가 과외비 마련을 위해 구두까지 수선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축 쳐진 어깨를 보자 다람이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어둠이 내려 앉을 즈음 두 사람은 집으로 터벅터벅 발길을 옮겼습니다. 가는 길에 할아버지와 다람이는 창식이 집에 들렸습니다. 다 고쳐진 구두를 본 창식이 엄마는 반색을 했으나 곧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창식이도 다람이를 본 순간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싱긋 웃었습니다. 제법 부드러워진 밤바람이 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어러만져 주었습니다. 이제 다람이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에는 기다리던 아빠의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더욱 반가운 것은 머지않아 할아버지와 다람이를 데리러 오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같이 그토록 보고싶은 엄마를 보러 가자며 외갓집의 아람이에게도 편지를 띄웠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빛을 내느라 서로 다투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숨결이 이렇게 고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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