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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을 삼켜버린 천사-선안나 지음 |  | |
| 그날 나는 텔레비전에 나온 천사를 보았습니다. 팔과 다리 대신 하늘나라 웃음을 지니고 이 세상에 온 구원이와 그를 지키는 지상의 천사들에게 이 동화를 바칩니다.
새내기 천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천사가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천사 생활을 아주 오래 한 고참 천사와 짝이 되어 지구에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신나요. 사람들이 사는 땅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 몰랐어요. 그런데 선배님은 지구에 여러 번 다녀오셨다면서요? 몇 번이나 갔다 오셨어요? 열 번? 스무 번?˝
어쩌구 저쩌구 재잘재잘.
숨도 쉬지 않고 떠드는 새내기 천사를 고참 천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이봐, 새내기 천사. 자네는 꼭 놀이 동산에 소풍 가는 애들 같군. 우린 지금 지구로 관광을 떠나는 게 아니야.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거라고. 그리고 말야, 천사는 항상 천사답게 의젓하고 품위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모르나?˝
˝죄송합니다.˝
˝어험.˝
고참 천사는 가방을 메고 성큼성큼 앞서 갑니다.
새내기 천사는 그 뒤를 종종거리며 따라갑니다.
두 천사는 천사 본부 한복판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섭니다. 엘리베이터에는 ´열림´, 닫힘´외에 세 개의 단추가 더 있습니다. ´하늘´, ´땅´, ´연민´.
새내기 천사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입을 오래 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배님, 하늘을 우리 나라고, 땅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요? 그렇다면 연민은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들이 가는 곳일텐데.....왜 연민이라고 씌어 있죠? 연민은 무슨 뜻인가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네. 저 곳으로 간 사람들은 대부분 어리석어. 어리석기 때문에 바른 길을 두고 나쁜 길로 접어 들어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 그러니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나?˝
고참 천사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습니다.
새내기 천사는 가슴이 찌르르 울려 옵니다.
´괜히 무서운 척하시지만 선배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야. 난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고.´
새내기 천사는 고참 천사를 아까보다 열 배는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표시를 내지는 않았지만 말이에요.
´땅´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선배님.˝
˝음.˝
˝우리가 할 일은 대체 어떤 거죠?˝
˝백문이 불여일견일세.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지. 이제 땅에 도착한 것 같으니 직접 눈으로 보면서 설명 듣게나.˝
˝벌써 다 왔어요˝ 하늘과 땅 사이가 아주 먼 줄 알았는데.....˝
˝하늘 나라 엘리베이터 아닌가. 시간이나 거리 같은 건 문제가 안 되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립니다. 새내기 천사는 고개를 빼끔 내밀고 아래를 봅니다.
저만큼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보입니다.
오밀조밀, 아기자기 정다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가까이 갈수록 숨쉬기가 점 점 힘듭니다. 새내기 천사는 쉴새없이 기침을 하며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려야 했답니다.
˝지구의 공기는 정말 지독하군요.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죠?˝
˝처음엔 하늘 나라와 이 세상이 똑같은 환경이었다네. 그런데 하늘 나라는 처음 그대로인 반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터를 너무 많이 망가뜨렸어. 눈앞의 작은 욕심에 급급한 탓이지. 어리석은 사람들.˝
어리석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 아니라 무서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자신을 망치는 데 그치지 않고, 죄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못 살게 만드니까요.
˝이봐, 한눈 팔지 말고 자세히 보게. 가슴에 꽃이 핀 사람들이 보이지?˝
˝어디.... 네, 그렇군요. 저 쪽에 있는 할아버지, 맞은 편의 뚱보 할머니, 그리고 저쪽 대머리 신사도.˝
˝그 꽃들을 거두어 하늘로 무사히 가져가는 것이 우리 임무라네.˝
두 천사는 사람들 가슴의 꽃송이를 떼어 가방에 담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 가슴에 꽃이 피어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있으니까요.
새내기 천사가 가만히 살펴보니, 꽃은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가슴에 많이 피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뚱뚱한 아주머니나 멋진 청년, 더러 어린 소녀의 가슴에도 꽃이 피어 잇습니다.
파란 꽃, 빨간 꽃, 큰 꽃, 작을 꽃, 싱싱한 꽃, 시든 꽃, 향기로운 꽃, 고약한 냄새가 나는 꽃....사람들 가슴에 핀 꽃은 모양도 향기도 가지가지입니다.
수도원, 시장, 감옥, 학교, 병원...... 장소에 따라 사람들이 가슴에 핀 꽃의 종류가 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도원 안에서도 더러 볼품없는 꽃을 피운 사람도 있고, 감옥에 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을 피운 사람도 있습니다.
˝가슴에 꽃을 단 사람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진 사람들이죠?˝
˝그렇다네.˝
˝그런데 꽃들을 왜 하늘로 가져가야 하죠?˝
˝중앙 컴퓨터에 넣어 분석하기 위해서지.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꽃씨를 품고 세상에 태어난다네. 그런데 사람마다 각각 다른 꽃을 피우지. 꽃 모양은 그 사람의 일생을 나타내준다네.˝
˝그러니까 컴퓨터가 꽃을 분석한 결과표를 보고, 그 사람을 ´하늘´로 데려올 것인지, 다시 ´땅´으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연민´의 세계로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는군요.˝
고참 천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바람에 떠밀리듯 비틀비틀 걸어옵니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머리에 희미한 눈빛이 제 정신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할머니의 가슴에 핀 꽃은 숯덩이처럼 새까만 빛깔입니다.
˝순분아..........동아...........아가야.................˝
할머니는 허공으로 손을 허우적대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더니, 다시 비틀비틀 사라져 갑니다.
˝선배님, 저 할머니는 무슨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길래 꽃 색깔이 저렇지요? 틀림없이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싶군요.˝
고참 천사는 새내기 천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휴대용 컴퓨터를 건네줍니다. 할머니의 꽃을 컴퓨터에 접속시키자 곧 화면 속에 할머니의 일생이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전쟁중입니다.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피난민들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 때 아주머니가 안고 있던 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젖을 물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눈빛이 험악해집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적군이 들으면 모두 끝장입니다. 아주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아기의 입을 틀어막습니다. 버둥거리던 아기가 얼마 뒤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습니다.
새내기 천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저건 아주머니의 잘못만은 아니에요. 전쟁탓이죠.˝
˝계속 보게나.˝
화면 속에 다시 아주머니가 나타납니다. 남편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에 아주머니가 기절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납니다. 아주머니에게는 돌보아야할 아이가 넷이나 있는 것입니다.
전쟁 뒤의 잿더미에서 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너무나 힘듭니다.
아주머니는 철부지 막내딸을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입양을 보내고 맙니다. 소아마비에 걸린 둘째 아들은 고아원 문 앞에 버립니다. 그때마다 아주머니가 어찌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새내기 천사는 자신의 가슴이 다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아주머니도 가족들과 재미있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주머니는 남은 두 아이를 기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살기가 힘겹다 보니 어느 새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부자집 물건은 물론이고, 영양 실조에 걸린 가엾은 아이의 밥이 될 한 줌 쌀까지 훔쳐내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새내기 천사는 그만 눈을 감고 맙니다.
´모든 생명은 다 귀한 것이랍니다. 내 아이가 소중하면 남의 생명 소중한 줄도 알아야지요. 어리석은 사람.......˝
더 힘든 환경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향기로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에 비하면 할머니가 많은 잘못을 저지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좋은 나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할머니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젊었을 때 그 많은 슬픔과 고통들 겪고, 늙어선 정신마저 잃어 저렇게 떠돌아다니다 이 세상을 떠나선 다시 ´연민´의 세계로 보내져야 한다니..... 새내기 천사는 할머니가 너무나 불쌍집니다.할머니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한없이 미워집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 때문에 약한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구나.´
새내기 천사는 할머니의 검은 꽃을 차마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가방 속에 담긴 흉하고 냄새나는 꽃들을 전부 불꽃 속에 태워 버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으로만 가득 찬 가방을 들고 하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선배님.˝
˝왜 그러냐?˝
˝만약에 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죠?˝
고참 천사는 엄한 눈빛으로 새내기 천사를 바라봅니다.
˝천사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지. 특히 일부러 그랬을 경우에는 하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된다네.˝
˝그렇지만 꽃이 없으면 그 사람은 ´연민´의 세상으로 가지 않아도 되겠죠?˝
˝그건 그렇다네.˝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되죠?˝
˝다시 한 번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네. 새 꽃씨로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울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지.˝
새내기 천사의 얼굴을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렇다면 됐어요.˝
새내기 천사는 갑자기 할머니의 검은 꽃을 꿀꺽 삼켜 버립니다. 그리고 가방 속의 다른 흉한 꽃들도 씹어 먹습니다. 고참 천사가 깜짝 놀라 가방을 뺏았지만, 그새 꽃을 세 송이나 먹어 치우고 말았습니다.
˝이 철부지 천사야, 도대체 어쩌려고 이런 짓을 한 거야. 자네는 이제 큰 벌을 받게 될 거야.˝
슬픔에 잠긴 고참 천사에게 새내기 천사는 오히려 티없이 맑게 웃어 줍니다.
´선배님 마음, 저도 알아요. 선배님도 언제나 저처럼 행동하고 싶으시지요? 하지만 하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나 참고 계신 거죠. 마음대로 하는 저보다 하지 않는 선배님의 사랑이 훨씬 깊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 같은 철부지 천사가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얼마 뒤 하늘의 법을 어긴 죄로 한 천사가 쫓겨났습니다.
네 송이 꽃을 먹어치운 죄로 두 팔과 두 다리를 얻지 못했지만, 티없는 웃음만은 그대로 지닌 채 이 세상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 이름은 구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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