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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 동 자(童子)-전성희: 사이버아동문학관에서 옮겨옴 |  | |
| 집안 가득 팥죽 쑤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대체 할머니와 엄마는 무슨 정성인지 모르겠다.
해마다 잊지 않고 꼭 이 날만 되면 저렇듯 팥죽을 쑤어대느라고 야단이니.
오늘은 아침부터 작은 엄마까지 오셔서 집안이 더 북적거리는 것 같다.
‘칫, 저러다가 호랑이라도 나타나서 잡아먹겠다고 하면 어쩌려구?’
전래동화에 나오는 팥죽할멈 얘기가 떠올라 이렇게 생각하다가 ‘픽’ 웃어버렸다. 내가 생각해 봐도 너무 싱거운 생각이 들어서다.
“형, 팥죽 좋아해?”
사촌동생 기형이가 물어본다.
“임마, 좋아할 게 없어서 팥죽을 좋아하냐?”
“난 맛있던데. 팥죽 안에 들어 있는 새알심이 난 더 맛있더라.”
“야, 넌 입맛도 괴상하다. 그걸 무슨 맛으로 먹냐? 난 팥빵도 싫더라.”
“자, 우리 강아지들,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봐라.”
할머니께서 쟁반 가득 팥죽 그릇을 들고 들어오셨다.
“야, 맛있겠다.”
기형이는 덮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넙죽 쟁반 앞으로 가서 앉는다.
“도형이도 얼른 와서 먹어 봐.”
“할머니도 참. 제가 팥죽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요?”
“인석아, 한번 먹어 봐. 오늘은 새알심도 듬뿍 넣었는데.”
“으윽, 그걸 무슨 맛으로... .”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게야.”
“설날에 떡국 많이 먹으면 돼요.”
“으이그, 저 고집하고는, 쯧쯧.”
“아빠도 팥죽 싫어하잖아요?”
“그러니 아직도 철이 덜 들었지.”
할머니는 평소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니는 아빠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빠는 새로 시작했다는 어떤 일 때문에 벌써 사흘 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내가 아빠 얘기를 꺼낸 탓에 할머니는 기분이 언짢아지셨는지, 팥죽을 드시다말고 방을 나가버렸다.
“형, 큰아빠는 언제 오셔?”
기형이는 입안 가득 새알심을 넣은 채로 나를 향해 물었다.
“나도 몰라 임마. 근데 넌 그게 그렇게 맛있냐?”
“응. 형도 먹어 봐.”
“너나 많이 먹어라. 자, 이것까지 먹어버려.”
난 큰 인심이라도 쓰듯 내 앞에 놓인 그릇을 기형이 쪽으로 밀었다.
“도형이는 팥죽 안 먹을 거면 심부름이나 해.”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심부름이라니, 뭔지 알 만하다. 장독대와 헛간에 놓았던 팥죽 그릇을 들고 오라는 거겠지.
‘엄만, 이런 거 다 미신이라니까... .’
행여 할머니가 들을까 입 밖으로는 내뱉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댔다.
마루문을 밀치고 나가려니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덥석 안겨왔다.
“읏, 차가워!”
신발이 유난히 차가워서 보니, 언제 내렸었는지 얇게 눈이 쌓여 있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그다지 많이 내리지는 않았다.
“엄마, 밖에 눈왔어요.”
나는 안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한 후에 마당으로 내려섰다.
‘왜 이런 일은 나만 시킨담.’
어둠 속에서 뒤꼍의 장독대까지 가려니 자꾸만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대체 우리 집은 귀한 외아들 대접을 전혀 안 해준다니까.
찬바람이 또 한번 가슴께로 몰려들었다.
부르르 몸이 떨려오면서 문득 오줌이 마려웠다.
그렇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집안의 화장실로 가는 것도 귀찮았다.
대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히힛, 이 저녁에 누가 보겠어?’
대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밭에다 대고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거뭇거뭇한 것이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팥죽이었다. 할머니가 뿌렸을 게다.
‘칫, 우리가 밥풀이라도 흘리면 뭐라고 하시면서, 할머니는 왜 쓸데없이 이런 데다가 팥죽을 뿌린담.’
오늘 따라 할머니에게 공연히 심통이 났다.
할머니가 뿌린 팥죽 위에다가 오줌줄기를 들이댔다.
“헉!”
바지춤을 올리며 대문으로 들어서려던 나는 그만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왼쪽 담벼락 아래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나서 가만히 대문 안으로 발을 디밀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꿈틀거리는 그 것이 갑자기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이 생겼다.
그런데 내가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그 검은 물체가 쑤욱 더 커져버린 것이다.
“으, 으악!”
내 깐에는 소리를 지른다고 질렀는데, 내 맘과는 달리 소리가 자꾸 안으로만 잠겨들었다.
“뭘 봐?”
어쩐지 칙칙하게 여겨지는 그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가슴이 그만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누, 누, 누구세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집 쪽으로 향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좀 나왔으면.... .
“너, 여기 사냐?”
그 검은 물체가 천천히 일어났다.
자꾸만 입안에 침이 고였고, 그 때마다 그걸 삼키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너, 여기에서 사냐구?”
목소리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상대가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무섬증이 덜했다.
“그런데요.”
말해놓고 나서 좀 더 자세히 보니, 거의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칫, 저런 아이 때문에 그렇게 놀랐다니.
잔뜩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창피함과 분노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야, 너 누군데, 이 밤중에 장난질이야?”
제법 목소리를 높여 봤다.
“니네 먹을 것 좀 있냐?”
어라, 그러고보니 이 녀석 순 거지 아냐?
“대체 어디서 온 녀석이야? 넌 집도 없냐?”
“먹을 것 좀 있냐구?”
녀석이 되레 나한테 신경질이다.
하긴 이 추운 겨울밤에 밖에서 떨고 있었으니 제 정신이 아니겠지. 어쩐지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집에 따뜻한 팥죽 있는데 줄까?”
“팥죽은 싫어!”
녀석이 더 신경질적으로 펄쩍 뛰었다.
“히히, 너도 팥죽 싫어하는구나?”
녀석이 팥죽을 싫어한다는 말에 내 맘이 좀 더 누그러졌다.
“씨이, 집집마다 팥죽 천지야.”
아주 못마땅한 어조다.
“기다려봐. 내가 다른 거 갖다 줄게.”
안으로 들어서려던 나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다시 녀석에게로 왔다.
“추운데 들어와서 먹어. 우리 할머니는 거지들한테 잘 해주시거든.”
“싫어. 사방에 팥죽 냄새가 진동을 하잖아.”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아닌게 아니라, 담벼락 뿐만 아니라 대문, 수돗가 등등 곳곳에 팥죽이 뿌려져 있었다.
‘칫, 거지 주제에 냄새 핑계는... .’
난 팥죽을 싫어해도 냄새는 그런 대로 참을 만 했다. 내 생각에 아마도 녀석은 내가 자기더러 거지라고 해서 화가 났을 것이다.
난 서둘러 뒤꼍으로 갔다. 장독대 위에 놓여 있는 팥죽 그릇이 보였다.
그릇을 부엌에 갖다 놓고는 여기저기 선반을 뒤져보았다. 다행히 어른들은 다들 방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낮에 기형이가 떼쓰면서 먹다 남긴 밥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반찬 몇 가지를 대충 밥 위에 올려놓고 다시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녀석은 내가 가져다 준 밥그릇을 빼앗듯이 들고는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꽤나 배가 고팠나보다.
“야, 넌 이름이 뭐냐?”
거지에게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자.”
“뭐, 공동자? 헤헤, 무슨 이름이 그러냐?”
“그러는 넌 이름이 뭔데?”
“난 민도형이라고 해.”
거지에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것은 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은 더 이상하다.”
녀석, 아니, 동자는 이제 좀 살 것 같은지, 아까보다는 한결 말투가 녹녹해졌다.
“그런데, 넌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었던 거야?”
‘아빠거지, 엄마거지는 없니?’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점잖게 물었다.
“오늘 어떤 집에 가기로 했었는데, 팥죽 냄새가 하도 심해 못 들어가서 이러고 있는 거야.”
“누구네?”
“저어기 냄새 지독한 나무대문집.”
동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곰보아저씨네 집이다. 그럼 얘는 거지가 아닌가?
“친척집이야?”
“알 것 없어.”
“근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팥죽 냄새 난다고 안 들어가냐?”
“정말 못된 사람들이야.”
나 참, 물론 나도 팥죽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팥죽 좋아하는 사람들을 못됐다고 욕할 것까지야 없잖아. 동자는 나보다 훨씬 더 팥죽을 싫어하나 보다.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할머니 말로는 곰보아저씨네 셋째가 어제부터 열이 아주 심하다던데. 그러니까 손님 맞을 정신도 없을 거야.”
“칫, 그 경황에 무슨 팥죽을 쑤었담.”
“아마 우리 할머니가 가져다 드렸을 걸.”
“늙은이가 할 일도 없네.”
동자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 집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 할머니더러 늙은이가 뭐야? 이 자식이 잘해줬더니만... .”
나는 당장이라도 한 방 먹일 태세로 동자를 노려보았다.
“그럼 네 할멈이 늙은이지 젊은이냐?”
동자도 만만치 않은 태세로 나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그 눈매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해 지는 것도 모르고 늦게 까지 놀다가, 서둘러 집에 가는 길에 어둠 속에서 맞닥뜨렸던 도둑고양이의 눈이 떠올랐다.
그 때 안 쪽에서 ‘드르륵’하고 마룻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 어딨어?”
기형이는 밖이 어두워서 무서운지 마당으로 선뜻 내려서지도 못한 채 나를 불렀다.
“나, 여기 있어.”
내 목소리를 듣자 기형이가 안심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나 열심히 팥죽을 먹었는지, 기형이의 입 언저리에는 아직도 팥죽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추운데 여기서 뭐 해?”
기형이가 가까이 오자 동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 내 사촌 동생이야.”
“에잇, 갈 거야.”
동자는 마치 화난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어딘가로 뛰어가버렸다.
“별 이상한 녀석 다 봤네.”
“형, 누구야?”
“거지.”
담 밑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빈 밥그릇을 겨울 바람이 핥고 있었다.
할머니, 기형이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왜 그렇게 뒤척이냐? 잠이 안 오는겨?”
“할머니, 배고파.”
“그러게 아까 팥죽이라도 많이 먹지.”
“사람들은 왜 동짓날에 하필 팥죽을 먹어요? 빈대떡 같은 걸 먹으면 안되나?”
“아주 옛날 옛날, 저어기 중국 땅에 성이 공씨인 사람이 살았거든”
“할머니, 옛날 얘기예요?”
자는 줄 알았던 기형이가 반색을 하며 일어난다.
“그려, 옛날 얘기여.”
“그 사람이 어쨌는데요?”
“그 사람한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 이 자식놈이 아주 형편없는 망나니였지.”
“망나니가 뭐예요, 할머니?”
기형이가 또 끼어든다.
“임마, 가만히 듣고나 있어.”
“동생한테 그럼 쓰나? 기형아, 망나니란 아주 형편없이 못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야.”
“얘기나 해줘요, 할머니.”
나는 할머니의 얘기를 재촉했다.
“그 망나니 아들 녀석이 부모 속을 지지리도 썩이더니만, 결국 추운 겨울에 밖에서 헤매다가 얼어죽은 거야. 그 날이 바로 동짓날이었지.”
“그 때도 동짓날이라는 게 있었어요?”
기형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휴, 또 끼어들어.’
꿀밤을 먹일까 말까 고민이 된다.
“그럼, 있었지. 그 아들이 죽어서 역신이 됐는데...”
“역신이 뭐에요?”
기형이가 또 끼어들었지만 이번에는 참기로 했다. 나도 역신이 뭔지 궁금했으니까.
“역신이 뭔가 하면, 아이들한테 몹쓸 병을 가져다 주는 귀신이지.”
“죽어서 귀신이 된 거예요?”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못된 짓을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아들이 살았을 때 팥을 아주 싫어했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신이 못 오게 동짓날 팥죽을 먹게 되었지.”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퍼뜩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까 그 아이... 공동자. 성이 공씨잖아. 팥죽을 싫어하고....’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었다.
난 이불을 확 뒤집어쓰고는 할머니 가슴께로 파고들었다.
“아니, 다 큰 사내녀석이 웬 겁이 이렇게 많다냐?”
“히히, 형 겁쟁이다. 난 하나도 안 무서운데.”
할머니와 기형이가 뭐라 그러건 말건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 후로 나는 동짓날만 되면 두 눈 질끈 감고 팥죽 한 그릇을 먹어치웠다.
“역시 식성은 크면서 변한다니까.”
흐뭇해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말이다.
*작가 소개: 전성희 선생님은요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비교문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어요.
1995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내동생>이 당선되었고,
지은 책으로는 <엄마 닭의 보물>(2000), <이대로가 좋아요>(2000), <게임의 비밀>(2002)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강변>,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문화센터 ’글쓰기교실’ 강사이고, 항공대 사회교육원 ’어린이 독서지도’ 강사입니다. 현재초등학교 ’논술교실’강사로 있으며 번역문학가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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