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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상에 숟가락 하나 |  | |
| <영광도서-독서 토론회>에서 제주 4.3을 최초로 형상화한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님을 뵌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내면의 촉수를 건드리는 소설{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재밌는 제주 방언을 맛볼 수 있는 {지상에...}는 자전적 성장소설이지만, 단순히 개인사에 국한하지 않고 지역의 역사로 승화하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나의 과거에는 나의 개인적 과거 뿐만 아니라 내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과거, 즉 역사도 들어 있˝는 것이다. 개인사와 공동체의 역사가 만나는 정점은 역시 4.3사태이다. 인간의 경험·상상력을 훨씬 능가한 엄청난 살육과 방화를 놓고 어찌 잔인하다, 무자비하다 하는 따위의 빈약한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제주 전역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카니발은, 그래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의 참사˝이다.
누구나 영혼을 지지고 간 시간의 섬광, 그 봉인된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어느 맑은 날, 짧은 순간의 바람에 뒤척이는 나뭇잎, 생의 한 고비에서의 만남과 이별, 유년의 열려진 창을 통해 보이던 먹구름과 눈물같은 별들, 남루한 혹은 영롱한 삶의 순간들...그 속에 한 소년이 서 있다.
물로 갇힌 섬 땅, 그 수평선을 뚫고 세계로 나아갈 꿈을 키우던 소년, 그 문턱에 장애물로 서 있는 제 아비를 박차고 나아갔던 소년이 이제 심신이 피곤한 중노인이 되어 모태로의 회귀를 시험한다. 낯선 골목길을 돌아나올 때 눈물을 핑 돌게 만드는 된장국 냄새는 이미 냄새를 넘어 따뜻한 저녁식사와 단란한 가족에 대한 하나의 추억이듯, 이 작가에게 고향이란 태어난 장소의 의미를 넘어서 광휘를 발휘하던 과거의 전부이다(그는 글 쓰는 내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해서 참 행복했다 한다 *^_^*).
첫머리엔 아버지의 죽음이 놓여있다. 41년생인 작가는 이에 촉발되어 50여년전 유년의 기억 속으로 자맥질을 시작한다. 죽음이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자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이끄는 것이다.
아버지는 병들어 밖으로만 돌고, 어머니는 아기를 데리고 외가에 가 버리고, 불화로 싸움이 잦은 조부모 밑에서 아이는 외로움을 키운다. 부모의 부재 속에 밍근한 눈물이 소리없이 볼을 타고 내리곤 하던 유년의 어느 날, 해 저문 초저녁 서편하늘을 유난히 붉히며 시작된 방화는 중산간 지대 130여개의 마을을 불태웠다. 이로 인해 소년의 고향인 함박이굴도 지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다. 하늘마저 불 지른 듯 벌겋던 초토의 방홧불이 지닌 의미는 진정 무엇이었을까.
그 시절을 겪은 소년의 정서는 왜곡되어, 아름다운 동백꽃이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여겨진다.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는 잔인한 낙화는 그에게 목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참화 속에서도 생명은 자라난다.
소년은 폐허 속에서 어린 오동나무 한 그루가 분수처럼 솟아 있는 걸 본다. 녹슨 못들과 숯더미를 뚫고 시퍼렇게 솟아 올라 생명의 상징으로 소년의 심중에 정착된 오동나무. 가난은 흔히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지만, 살인적인 가난도 아이들의 성장을 막지는 못한다.
역사의 질곡을 애써 떨쳐버린 작가의 아우라는 비로소 천진성의 세계로 눈길을 돌린다. 제대로 된 이름은 학교 출석부에만 있을 뿐 다들 별명으로 통하던 아이들. 놀이에 정신팔려 어머니가 옷을 가져가 버린 줄도 모르다가 사추리만 겨우 가린 채 집으로 냅따 뛰던 벌거숭이 똥깅이(작가), 국기 게양대에 쪼르르 올라 고장난 도르래를 고치던 나무 타기 도사 웬깅이, 입술까지 흘러내린 누런 코를 국수가락 빨아들이듯 들이마시던 누렁코, 입술 오므라든 모양이 닭의 미주알 같았던 닭똥고망, 돌패기, 주넹이 들에겐, 돼지 오줌통이 축구공이 되고, 전쟁놀이가 최고의 놀이이던 시절이 있었다.
삐라가 난무하고, 운동회 때의 홍백전이 청백전으로 바뀌어야만 했던 시절, 붉은 색은 곧 불온한 색이라고 철저히 금기시되던 때라 홍띠에 대한 기억조차 부담스러울만큼 Red Complex를 심하게 앓던 시절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반공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섞인 정체성 혼란을 여태껏 겪어 왔다. 이런 이념적 혼란은 4.3을 경험한 제주 사람들에게 특히 심한 후유증을 남긴 듯하다. 지난 50여년간 좌경분자나 반체제인사에 대해 고문·테러·살해 등으로 실천되어온 빨갱이에 대한 증오는,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질서를 정화하여 국민의 삶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일 필요가 있는지,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억압적인 권력에는 저항이 따르게 마련이므로, 국가가 법의 이름을 강제하려면 그것이 개인에 선행하는 공동의 선임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부치는 소위 ´매카시즘´의 징후만이 섬 땅에는 가득하다.
부재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며 자식을 키우고 살아야 할 책임은 온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아이고, 성님. 전쟁터에 나간 아방은 소식도 없고, 이 어린 것들을 어떵 먹여 살릴꼬, 예?˝하고 한숨을 쉬는 어머니의 고된 노동에 대한 위로의 말은 오직 ´그래도 살암시민(살다보면) 살아진다.´ 뿐이다.
아버지는 일탈행위에 빠져 휴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린 것은 자존심 강한 어머니는 물론, 소년에게도 큰 충격이고 불행이었다. 그런 중에도 제 2차 성징을 맞은 소년은 자아에 눈뜨고, 이성에 열렬한 관심을 갖게 된다. 소년의 사춘기는 퍼소나의 의식적 지향과 아니마의 무의지적 자율성이 충돌하는 혼돈의 모습이다.
다시 초로의 작가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부자간에 놓여 있던 세월의 간격과, 불편했던 과정들을 일시에 제거하면서 그를 아버지의 자리에 옮겨 놓는다. 제주의 바다 앞에서 그는 선언한다.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 준다. 나는 한시적이고, 저 바다는 영원한 것이므로.˝ 이는 세계와 대면하는 작가의 의식이자, 변방의 민족을 향한 오연한 일체감이다. 어머니의 생활력이 그를 먹였다면, 섬의 생명력은 그를 길렀던 것이다.
일용할 양식과 인간을 맺어주는 숟가락, 작품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숟가락´의 메타포는 무엇일까. 장두 이덕구의 시신 앞주머니에 집행인이 조롱하듯 꽂아놓은 숟가락, ˝그것 보라,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앰시냐.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일로 중한 거다˝라는 어머니의 숟갈론. 숟가락의 의미는 팥벌레에 집약된다. 옥황상제의 딸이 밥 빌러 온 인간을 푸대접하다 콩밭에 떨어져 벌레가 되고, 꽁무니에 숟가락 꽂은 몸으로 평생 밭을 벗어나지 못하고 귀양살이하는 모습.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 될까봐 두려웠던 소년은 ˝나는 내 꽁무니에 꽂은 숟가락으로 어떤 밥을 먹게 될 것인가?˝하고 고뇌한다. 일손이 모자라는 어머니를 도우면서 자신에게도 팥벌레와 같은 운명의 굴레가 씌워진 게 아닐까, 불안해하던 아이.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던 내밀한 욕망 속에는 더 나은 숟가락을 가지려는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작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듯한 숟가락을 얻는 일에 인생을 모조리 바친다. 그러나 이기심과 개인적 욕망이 들끓는 지상에서 최후에 남는 것은 결국 빈 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어쩔수없이 심란해진다.
제주도는 역적질할지 모른다고 죽임을 당하는 유형의 장사 설화가 유독 많이 분포된 곳이다. 이는 차별이 극심한 섬 땅에 태어나, 척박한 조건을 극복하려고 분투하다가 좌절하는 불운한 인재들을 상징한다. 작가가 그러하였듯 섬 고장 젊은이로서 비상을 꿈꾸어 본 자는 그 환경의 숙명적인 무게를 느꼈을 것이다. 해변의 검은 현무암, 말라붙은 건천들의 뼈빛 화강암 무리들, 거센 파도와 비바람에 맞서 인간의 뼈와 피가 더욱 오만해지고 완강해지는 곳, 그속에서 인간들이 뿌리내려 그물같은 집단으로 존재해왔다. 4,3의 바탕에도 이런 성정이 있을 것이다. 관권의 폭압에도 좀체 굴하지 않던 혼, 항쟁으로 점철된 역사...숱한 인간들이 멸망하고, 남은 것은 깊은 한과 슬픔들, 아름다운 풍광의 배후에는 아직도 진혼되지 않은 수만 원혼들이 음산한 기운으로 있건만, 그 풍광을 뚫으며 화사한 관광객들이 유쾌하게 흘러간다. 옛 것들은 망가지거나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향락적 소비문화의 광기에 지배당하고 있다. 삶과 자연이 더 이상 공존할 수 없을만큼 피폐해진 고향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우울하기만 하다. 그는 과거로의 수직적 확장을 통해 공생의 삶을 누리던 수평적 세계를 보여주고, 이의 현재적 부활을 꿈꾸고 있다. 부산 토박이인 나는 ´고향´이라는 것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없다. 중학교 때인가 교과서에 실린 오영수님의 {요람기}를 읽고 그 체험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인간에게 정주 공간으로서 고향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진정한 관계맺음을 거절당한 채 사물화된 존재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고향은 넉넉함과 푸근함을 준다. 증오와 허기의 삶을 벗어나 사랑과 신뢰를 만날 수 있는 곳도 고향이리라.
책을 덮으니 이미륵님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떠오른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여 있다는 점,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는 점, 고뇌까지도 향수로 인해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점, 근원적인 감성을 자극한다는 점, 친구를 통해 성장한다는 점, 압록강이 고국을 떠나는 경계선이었듯 바다는 모태를 벗어나는 경계선이 되었다는 점, 강의 흐름이 역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듯 강물이 모이는 바다에도 결마다 역사가 스며있다는 점 등이 닮아있다.
폴라로이드적 감수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4.3의 문제를 이끌어 낸 점에서 그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세상에 감추어진 사실들이 역사 앞으로 불려 나와 진실을 말하고, 그것이 또한 그러한 역사적 비극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산호와 진주가 깊은 바닷속에서도 익사하지 않는 것처럼, 삶의 숙명적인 무게에 짓눌려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힘들고 어렵거나, 난관에 봉착하면 환경이 내 어깨를 찍어누르기 때문이라고 불평하곤 했는데, 나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며 살아오신 분을 보니 부끄러워진다.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참고 견뎌야 할 고통이 많으리라. 그것을 견딜 것인지, 이겨낼 것인지, 절망할 것인지는 각자 선택해야 할 몫이지만, 이 책은 고통을 이겨내는 쪽에다 힘을 실어 줄 것이다. 세월의 거센 물결이 켜켜로 밀려온다 할지라도 가라앉지 않는 부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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