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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래의 여자 |  | |
|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는 건 올바른 독법은 아니지 싶다. 안목의 부족이거나 적어도 너무 소박한 독서일 게 분명한데, 내게는 줄곧 연애소설로만 들어왔다. 그것도 ´슬퍼서 아름다운´ 혹은 ´아름다워서 슬픈´ 이른바 육십년대적 정서의 애틋한 연애소설로.
이 소설은 도입부에서 먼저 주인공의 실종이 사후 보고되면서 시작된다.
한 남자가 실종된 지 7년이 지났다!
이 짧은 보고가 있은 후 소설은 곧바로 7년 전으로 거슬러 한가로운 어느 시골역에 내리는 남자를 보여 준다. 이런 구성이 딱히 이상하달 건 없지만, 7년이라는 기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2절의 열차역 장면에서 바로 시작해 순차적으로 남자의 뒤를 좇을 수도 있겠는데 작가는 왜 사후 보고를 먼저 던져 줌으로써 이 소설이 실종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미리 전제코자 했는지 그 작의가 은근히 궁금하다.
소설에 서사적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이해가 자연스러운데, 주제와 관련된 좀더 깊은 의도가 있으리라 짐작해 보기로 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
곧 남자는 실종이 아니라 자의에 따라 사라졌다는 것, 다시 말해 못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안 돌아온 한 남자의 모종의 결단 혹은 변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작가가 그 점을 서두에서 넌지시 일러주려 한다는 것.
작의가 그렇다고 하면 이제 중요한 것은 실종의 ´상황´이 아니라 ´속내´이다. 이 남자는 왜 사라졌는가, 왜 안 돌아오는가?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에는 모두들 은밀한 남녀 관계 때문이라고 상상˝하게 될 것인데, 상대와 운명적으로 교감하면서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애틋한 연애 아니면 평범한 남자의 느닷없는 사라짐은 좀체 일어나기 힘든 때문.
과연 어떠했던가, 남자는 한 여자를 만났고, 동침을 했고, 라디오를 사 주고 싶어했고, 킥킥거리며 함께 비밀을 속닥거릴 날을 위하여 기꺼이 탈출을 유예시킨다. 그러니 이는 연애소설 아닌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열망과 희생의 서사, 가슴 저릿한 연애소설! (후, 자기 견해를 강요하는 이 무대뽀 논리)
보자, 본격적으로 소설이 열리면서 드러나는 건 일단 우리가 흔히 ´카프카적´이라 명명하는 낯설고 기이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시민이 어느 날 갑자기 정체도 배후도 알 수 없는 모종의 폭력적 음모에 포박된다는 식.
절대 고독을 강요받으며 한줌 익명의 사물로 전락돼 가다가, 이윽고 누가? 왜? 하필이면 나를? 이라던 항의성 질문이 차츰 무력한 승복으로 바뀌어 가는, 일컬어 실존의 해체라던가, 세계의 관료성이라던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말하자면 십자가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됨을 인정해 버리고 마는 형벌과 고해의 서사.
이런 소설의 미덕은 우선 상황 자체의 엽기성에 있다. 미로 같은 구조, 눈앞에서 흐릿해지는 사물, 야릇한 냉소의 시선, 느닷없는 통보와 명령, 그리고 이런 상황 자체가 섬뜩히 실감시키는 우리 존재성의 허약한 기반.
또한 평범이 엽기를 만나면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시작된다. 비록 강요된 사색이기는 하되, 상식이 전복된 상황 앞에서 숱한 질문과 의심을 통해 자기 삶을 근원으로부터 되돌아보게 하고, 이윽고는 세계의 형상과 그 배후의 어떤 절대 원리 같은 것을 그려보게 한다. 더불어, 무심히 끌고 다니던 자기 육체의 면면을 터럭과 땀숨 하나까지 생생하게 인식시킨다거나 사물의 미세한 틈새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
<모래의 여자> 역시 이런 미덕들로 넘친다. 모래 함정의 형상은 사실적이면서 환상적이고, 그 주변의 풍광들 - 달빛, 안개, 바람소리, 축축한 냄새 등의 묘사는 몽환적인 서정으로 가득 차 사뭇 미구의 비감한 운명을 예감시킨다.
저항에서 체념에 이르기까지의 주인공 남자의 심리 묘사도 촘촘하고, 간간이 끼어드는 철학적 단상은 상황의 긴박감을 적절히 이완시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우리네 실존 밑바닥의 허상과 위태로움을 돌아보게 한다.
자, 그러나 역시 내 마음에 파고드는 건 여전히 두 남녀 사이의 애절한 멜로. 남자가 여자를 처음 만나는 장면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둘 사이에 아직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면서도 무언가 뭉클하게 가슴을 때리지 않는가.
게다가 바지런히 움직이는 몸에서 배어나오는,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이 무엇보다 고맙게 여겨졌다.
그러고 나면 여자가 우산을 받쳐들고 남자의 식사를 돕는 예쁘게 엽기스런 대목, 계속 이어지면 이번엔 담담하면서도 조용히 상기돼 가는 여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다음과 같은 대목.
˝모래예요.˝
여자가 엎드려 몸을 뻗고는, 웃으면서 등잔불의 심지를 톡톡 쳤다. 금방 다시 불꽃이 밝아졌다.
말해 보자. 사실은 연애는 아무래도 좋다. 이런 상황에서 웬 연애? 모래나 곤충채집에 담겨 있을지 모를 어떤 상징성도 잘 모르겠다.(나는 상징이 정말 싫다. 머리 좋은 분들이나 많이 애용하시길)
이 소설에서 가장 매혹적인 건 무엇인가. 카프카적 상황 설정도, 미려한 풍광 묘사도, 촘촘한 심리 묘사도, 철학적 단상도, 모래에 대한 박학다식도 아니다. 모래집의 안주인, 엽기적인 그녀다.
이 어리숙한 촌부는 천만년 전부터 여기에 살아온 듯 자기 운명에 아무런 갈등도 욕망도 없다. 무엇을 숙명적으로 감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 모래가 되어 있다. 일컬어 이를 ´체념적 초탈´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삶에 새로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지만, 그렇게 다 놓아 버렸으므로 더는 절망도 조바심도 없는 상태. 여자에게서 보이는 무구한 단순성이 아마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지. 그러니 벌거벗어 봐야 음란이 안 되고, 라디오 하나에 아이처럼 들뜨지만 막상 그 라디오 없어지면 또 하냥 바람소리에나 귀기울일 것이다.
주인공 남자야 그 속절없는 단순무쌍에 울화 치밀고 힘 빠지겠지만, 여자가 저 깊이 가라앉아 얻은 생의 지혜를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저 또한 모래가 되기 전에는 끝내 알지 못할 일.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의 제목은 ´모래´도 ´실종´도 아니다. ´모래의 여자´다. 여자의 수줍은 미소, 묘하게 서글픈 눈빛, 고요한 순응, 묵묵하고 단조로운 성실성...여자의 그런 무구한 순정성이 이 소설에 겨울날 차가운 저녁의 밥 짓는 연기 같은 따뜻한 애상의 빛깔을 드리운다. 그래라, 말아라, 도주 수단은 뭐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지, 나른한 체념을 감염시킨다.
이 체념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래야 연애소설이라는 내 독단의 논리가 완결되니까. 이 사랑은 다시 또 연민인데, 연민은 ´련민´으로 발음해야 된다는 김승옥의 어느 소설 한 구절이 문득 기억나는데, 무릇 인간을 진정 연민할 줄 알게 되면 눈부신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법. 아주 간단히 진짜와 가짜를 보게 되는 법.
그리하여 소설 말미의 다음과 같은 신파는 생뚱하면서 얼마나 눈물겨운가.
마침내 삼륜차가 벼랑 위에 멈췄다.
반년 만에 새끼줄 사다리가 내려졌다. 여자를 번데기처럼 이불에 둘둘 말아 로프에 묶어 올려보냈다. 여자는 시선이 닿을 때까지, 눈물과 눈곱으로 거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애원하듯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안 보는 척,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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