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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테우리 |  | |
| 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대개 현기영이라는 이름에 가장 먼저 따라붙는 작품은 <순이 삼촌>이다. 그런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아직 현기영의 그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 소설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부끄러운 말이지만´이라는 내 전제로 해서 아마 <순이 삼촌>이 대단한 작품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함직하다.
이를테면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아직 삼국지를 읽어본 적이 없다´거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아직 베토벤을 들어본 적이 없다´거나 할 때처럼, 읽지 않은 걸 부끄럽다고 고백해야 하는 소설이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교양을 갖춘 사람은 당연히 접했어야 할 작품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허나 막상 그런 식으로 따지기로 하면 <순이 삼촌>은 그리 유명한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이 현대문학사의 한 부분에 자기 나름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고, 또 작가 현기영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 바로 이 소설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삼국지나 베토벤처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모르는 게 이상한 그런 소설이라곤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순이 삼촌>을 몰라도 간첩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나로선 이 소설에 대하여 부끄럽다는 토를 달지 않고 그저 못 읽었다고만 말하기는 아무래도 께름하다. 그것은 이 소설에 담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처가 주는 중압감으로 해서이다.
제주의 수많은 양민이 무참하게 죽어 간 이른바 제주4.3사건. <순이 삼촌>은 그 4.3의 아픔을 최초로 담아 낸 소설로서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작품이다.
현기영은 4.3을 주제로 다루었다는 것만으로 두 차례나 기관에 끌려가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는데, 나는 한 작가의 뜨거운 고뇌와 양심이 배어 있는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도 않았으니 어찌 부끄럽다는 토 한 마디 없이 낼름 못 읽었다는 말만 할 수 있으랴. 하기야 평론이나 기타 이러저러한 글들을 통해 그 줄거리는 환히 알고 있다. 어쩌면 그러다 보니 애써 챙겨 읽지 않고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테우리>를 이야기하면서 <순이 삼촌>이라는 옛 소설을 먼저 언급하는 까닭은 2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있으면서도 두 소설에 담긴 주제 의식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아서이다. 두 소설뿐이랴, 사실 현기영의 모든 소설은 오직 한 가지 주제로만 일관돼 왔다. ´제주의 수난사´가 그것이다. 좀더 좁혀 말하면 4.3 언저리의 상처들이다.
현기영은 작가 생활 20년 동안 한 눈 한번 파는 법 없이 제주 역사 하나만을 붙들고 있다. 뚝심이라면 대단한 뚝심이요, 고지식하다면 또 고지식하달 수 있겠는데, 무어라 말하든 자기 고향 제주에 대한 이 작가의 육친적인 애정과 소명 의식을 생각하면 나 같은 애송이 작가야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마지막 테우리´는 한 작가가 일관된 주제로 창작에 천착하게 될 때 그 정신의 깊이가 어느 정도의 원숙함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소설은 내가 근래에 읽은 단편 소설 중 가장 완벽한 형식미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소설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도 이미 많은 언급을 한 바 있는데, 평론가 염무웅은 ˝단편소설 역사에 기록될 명작˝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 해의 우수 작품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엮는 <오늘의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멋드러진 표현으로 이 작품을 평하고 있다.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는 이 작가 특유의 집요한 역사적 상상력이 이룩한 하나의 소설적 승리이다˝
이 정도면 가히 극찬이라 하겠는데, 이 소설은 분명 이만한 찬사에 값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아무리 현란한 찬사라도 그것이 작품 자체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품격과 맛은 어쨌거나 작품 자체로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소설을 보자.
<마지막 테우리>는 여전히 이 작가의 단골 메뉴인 4.3과 제주 역사를 그 바닥에 깔고 있다. 그러나 소설 표면에 설정된 공간은 한 늙은 목동의 어느 나른한 오후 몇 시간에 불과하며, 노인의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장면들도 노인의 개인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소설은 4.3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고 있지도, 격렬하게 고발하거나 웅변하고 있지도 않다. 소설은 다만 노인이 서 있는 나른한 언덕과 개인적인 회상 몇 자락을 좇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좇아감´이 범상치 않다.
작가는 테우리(목동) 노인 속으로 완벽히 동화되어 들어가 그 심경의 미세한 흐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노인이 흔연히 섞여드는 자연과의 일체감, 동물을 향한 순정무구한 친화감, 피어린 역사에 대한 끈적끈적한 회한, 운명 앞에서의 은은한 달관, 이런 만만치 않은 주제들이 완벽한 조화로 섞이며 지극히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가장 먼저 감탄했던 부분은 자연 묘사에 대한 유려한 문장이었다. 묘사 자체의 풍부한 서정성은 물론이거니와 문장마다에 담긴 시적 가락이 그윽하기만 했다.
이는 현기영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여러 번 느낀 것으로서, 이 작가는 특히 자연 현상이나 세월의 변모 등을 짧은 글에 축약하여 서술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이 소설은 문장 하나마다 만만치 않은 공을 들였으리라는 걸 여실하게 알 수 있는데, 아래와 같은 구절들을 읽다 보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어떤 경지를 느끼게 된다.
투명한 허공을 울리며 새 울음소리 영롱하고 풀씨가 빠르게 여물었다. 자굴풀 씨가 터지기 전에 목장마다 계꾼들이 올라와 월동용 건초를 장만했고 뒤따라 아낙네들이 말똥버섯 캐러 왔다 가자 초원은 다시 인적이 끊겨 정적이 왔다. 그 정적 속에서 툭툭 풀씨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늬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초원을 서서히 마르게 했다. 대기가 건조하여 콧속에 딱지가 앉곤 했다. 먼저 고사리떼가 시들면서 풀잎새들이 서서히 황갈색으로 바뀌어갔다. 풀거미는 풀입새를 돌돌 말아 제 몸을 감싸고, 꽁무니를 땅 속에 박고 알을 싸고 난 메뚜기들은 풀밭 위에서 맥없이 비슬거리고, 죽어가는 메뚜기들을 쫓아 산까마귀떼들이 날아들었다.
하늬바람은 계속 불어 땅 속까지 마르게 하여 샘물통의 물줄기는 실날 같이 가늘어지고 새벽 안개도 더 이상 피어오르지 않았다. 밤공기가 날로 차가와졌다.
실로 그림처럼 아름답고 생생하지 아니한가. 불현 휘늘어지는 대금 한 소절이라도 들은 듯하지는 않는가. 이 소설의 전반부를 이루는 자연(세월) 묘사가 모두 이런 식이다. 어느 만큼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어느 만큼 미학적 상상력이 섬세해져야 이런 구절을 뽑아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아득하기만 하다.
이렇듯 자연과의 온전한 일체감을 보여주던 소설은 이어서 동물에 대한 노인의 지극한 애정을, 아니 서로간의 생명적 교류를 몇 가지 예화에 담아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 점, 자기가 맡아 기르는 소 백이십 마리를 노인이 뿔모양 하나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며 구별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그럴싸하여 오히려 평범하다 할 것이고, 그보다는 다음과 같이 슬쩍 지나가는 구절에서 우리는 노인의 천진한 심사를 만나게 된다.
소들은 진드기약 치러 이따금씩 올라오는 제 주인은 몰라봐도, 노인만 보면 드러누웠다가도 와들랑 일어나 반색하곤 했다. 그걸 시기하여 주인들이 제 소와 친붙여보려고 약 치고 나서 잠시 놀아주는 시늉을 하지만 그게 어디 당할 노릇인가.
˝그게 어디 당할 노릇인가˝ -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한참이나 허허 웃었다.
이 소설은 1인칭 소설이 아니므로 위의 구절은 노인의 말이 아니라 작가의 서술이긴 하나, 이 표현이야말로 작가가 대변한 노인의 심정 그대로가 아니겠는가. 이 말 속엔, 주인은 제쳐두고 자신을 따르는 소들에 대한 노인의 지극한 애정과 자긍심이 들어 있다. 예컨대 어린 자식이 ´이 세상에서 아빠가 최고야!´라고 말할 때 그 애비가 느낄 흐뭇한 만족감과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는 것이다.
초원의 나른한 오후를 묘사하며 잔잔하기만 하던 소설은 노인이 본격적으로 옛시절을 추억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슬픈 색채를 띠게 된다.
폭도로 몰려 무참하게 살육된 양민들,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무수한 마을과 산야, 초원 여기저기에 나뒹굴던 마소의 시체들, 소설은 바야흐로 4.3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그 한복판에서 노인은 자신의 실수로 죽어간 어느 일가족의 최후를 뼈아프게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은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참혹하되 격렬하지 않고, 비장하고 스산하되 원한에 차있지 않다. 노인은 다만 ´마르지 않는 찬 샘´같은 잔잔한 슬픔을 이야기하고, 들판의 소울음을 빌어 영혼들의 울부짖음을 대신할 뿐이다.
작가는 고도의 절제를 통해 오히려 내밀한 울림을 전하는 바,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죽은 자들을 추억하기만 해도 독자는 숲 속에 무리지어 떠도는 슬픈 영혼들을 눈에 본 듯 선하게 그리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제주4.3이라는 국부적 상처를 뛰어넘어 좀더 깊이 주제를 확장시키는 것이니, 거기엔 한 이름 없는 노인이 온몸으로 비극을 관통하며 도달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잊혀져 가는 역사에 대한 가슴 시린 질타가 있다.
소설은 이쯤에 이르러 저 아래 골프장 건설 현장의 포크레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 소설의 절묘한 구성은 이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노인의 잔잔한 회상을 따라 제주의 피어린 역사를 되짚어온 독자에게 이 포크레인 소리는 생생한 진동으로 파고들며 온갖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이 소리는 단지 골프장 건설 현장의 소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역사 전체를 파괴하며 밀어붙이는 섬뜩한 굉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르면서 나는 문득 이 작가의 다른 작품 <거룩한 생애>를 떠올렸다.
제주 어느 잠녀의 당차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다룬 그 소설은 그러나 장편이 아니고 단편이었다. 장편이 아니라고 굳이 덧붙이는 까닭은, 주인공의 생애나 그를 둘러싼 역사적 정황이 넉근히 장편 하나를 만들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무렵엔 한 인간의 파란한 생애를 짧은 단편에 축약하여 속도감 있게 전개한 소설들이 심심찮게 발표되곤 했었다. 어느 평론가는 그런 유형의 소설들을 일컬어 ´민중약전´이라고 개념 정의한 바 있는데, 현기영의 ´거룩한 생애´는 내가 알기로 (적어도 그 무렵으로만 한정시키면) 그런 유형으로서는 최초의 소설이었다. 그리고 가장 빼어난 소설이었다.
´거룩한 생애´는 장편이 주는 대하적 감흥과는 또 다른 묵직한 감동을 독자에게 주었다. 숨가뿐 긴장으로 잠녀의 생애를 따라가던 독자는 소설 결미에 이르러 둔중하면서 날카로운 충격을 받게 되는데, 한 평자는 그에 붙여 ´단편소설에서도 비극적 위엄이 이처럼 높이 성취될 줄이야´라고 감탄했던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생애>에서의 그 비극적 위엄을 <마지막 테우리>에서 또 한번 만나게 된다.
갑자기 몰아닥친 강풍으로 눈보라 속을 헤매다가 겨우 산을 내려가게 된 노인이 보게 되는 절친한 친우의 죽음, 그 절제된 마지막 문장 한 줄이 어찌도 그리 서늘한 감동으로 가슴에 파고드는지,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는 한 이름 없는 목동의 쓸쓸한 삶에서 우리는 번쩍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는 세상, 인간과 자연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흔연하게 어우러지는 세상, 그런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이 소설을 맛있게 읽어낼 독자가 얼마나 될까?
이 소설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요즘의 가벼운 독서 풍토를 생각하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진지한 주제 의식이나 농익은 자연 묘사 따위(?)에 감동 받을 독자가 얼마나 될지 자신할 수가 없다.
얼마 전에 한 술자리에서 이 작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때 까마득한 후배로서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이 작품에 대한 독후감을 말했었다.
내 말이 끝나자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좋게 읽었다니 기쁘구만. 그런데 일반 독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어쩌누.˝
쓸쓸한 목소리였다. 혼자 쓰는 일기가 아닌 이상 소설은 일단 독자에게 읽혀져야 그 가치가 살아난다. 그런데 작금의 독서 환경이란 어떠한가. 일회적인 흥미본위의 독서만 만연하고 있어 진지하고 치열한 작가들은 시름겨운 소줏잔이나 기울며 허한 심사를 달래는 상황이 아닌가.
참을 수 없는 독자의 가벼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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