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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  | |
|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저서 중에 <행복한 책읽기>라는 게 있다. 이 책은 얼마 전에 출간되어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장정일의 독서일기>의 원조라 할 만한 책으로서, 저자가 읽은 다양한 책들에 대한 짧은 소감과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상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 일상사 안에는 문학평론가라는 저자의 위치에 걸맞게 주변의 여러 문인들이 등장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는데, 그 중에 소설가 복거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4시경에 복거일씨가 들렀다. 언제 봐도 깔끔한 차림인데, 수줍어하기는 계집애보다 더하다. 그가 하는 말로는, 대전상고를 나왔다고 하는데, 집안에서나 학교에서나 신동으로 꼽혔다고 한다. 하기야 대전상고를 나와 서울상대에 들어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그의 두 개의 계획: 어렸을 때 자란 파주 근방의 기지촌을 중심으로 한 중편 하나, 그리고 예비군 훈련에 관한 이야기 하나.
이 날 일기의 마지막 줄에는 복거일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기지촌 이야기를 쓰려면 걸리는 것이 참 많아요. 우선 제 아버님만 해도 살아 계시거든요...˝
이 작가의 두 가지 계획 중 ´예비군 이야기´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다른 하나인 기지촌 이야기는 지난 해 말에 책이 되어 나왔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편 소설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이 그것이다.
위의 일기가 1987년 1월의 것이니 작가는 근 8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그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하기야 어찌 8년뿐이랴, 아마도 이 이야기는 작가 복거일이 소설 활동을 시작하던 때부터 줄곧 가슴에 지녀왔을 게 틀림없다. 한 작가가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는 이야기는 세월이 얼마큼 흐를지라도 결국엔 소설로 쓰여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작가가 소설을 쓰는데 걸린다던 아버지가 지금은 돌아가신 걸까? 문득 궁금해지면서 공연히 가슴이 저릿해진다.
관계된 사람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 홀로 기록자로 남아 자기 성장기를 돌아다보는 작가의 감회란 어떤 것일까. 대개 작가가 한 편의 소설을 시작할 때면 언제나 이러저러한 육중한 부채감이 그 동기가 되는 법이지만, 그 이야기가 자기 성장 체험이나 가족사에 직접 닿아 있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부채감이 좀더 무겁고 아릿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작업이 소설 이전에 우선 고백이고 증언이며 추억이어서이다. 그런 이야기를 쓸 때에 작가는 소설이란 게 자기 ´업보´임을 새삼 느낀다. 소설 쓰기란 그래서 고통이며 동시에 행복이다. 또 하나의 업으로 들어서는 길이므로.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은 한 소년이 부모님을 따라 새로 형성되기 시작하는 기지촌에 정착하여 살다가 성인이 되어 그 기지촌에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소설은 소년 자신의 성장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다. 소년은 다만 관찰자의 시선이 되어 기지촌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삶의 풍경을 좇는다. 바로 이 소년의 눈에 비쳐진 기지촌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소설 안에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의 94개 장으로 나뉘어 하나의 기지촌 풍속도를 이루는 것이다.
위 일기를 보면 작가는 이 기지촌 이야기를 처음에는 중편 정도로 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묶여진 책은 장편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갑자기 할 말이 더 많아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참, 작가의 아버지는 정말 돌아가셨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지금 큰 실례를 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아버지 회상기´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아버지가 소설의 중심 축이 되고 있으며, 소설 안에서 아버지는 기지촌의 쇠락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는 것으로 돼 있다.
하기야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삶이 다 파란만장하다. 고향을 떠나 기지촌까지 흘러들어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평범한 삶은 아닌데, 거기에 기지촌이라는 공간의 독특한 생활 양식이 이들의 삶에 다시 숱한 우여곡절을 덧붙여 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기지촌 이야기´라기보다 ´기지촌 사람들 이야기´다. 기지촌이 어떤 곳인가를 들려주는 특정한 공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자기 생애 중 가장 절실한 시기를 기지촌에서 보낸 어떤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의 기지촌이 생성, 번성, 쇠락해가는 과정을 배경에 두고, 이 소설은 그 안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애틋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물들의 삶이 저마다 파란만장하고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성장기 체험이 진하게 배어 있으므로 작가는 이 기지촌 이야기를 유장한 서사로 풀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비교적 담담한 삽화적 구성으로 돼 있다. 소설의 큰 테두리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고 있으나, 그 안에 그려지는 94개의 삽화들은 각기 독립된 장으로서의 분위기와 완결미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 어떤 장은 원고지 2매가 채 안 되게 짧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작가 복거일은 대체로 소설의 호흡이 길고 스케일도 큰 편이다. 대표작이라 할 <비명을 찾아서>, <역사 속의 나그네>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 작가가 8년 이상을 묵혀 온 이 기지촌 이야기를 이렇듯 삽화적 구성으로 펼치고 있는 까닭은 이 소설이 결국 ´추억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복거일은 이 소설을 통하여 기지촌의 실태라거나 우리 현대사의 한 비극을 조명하겠다는 의도보다는, 다만 자기 추억 속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을 소설로 살려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충동이 더 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꼭 사진첩을 넘기고 있는 것처럼 한 인물, 한 장면 등이 앞뒤와 큰 상관 없이 툭툭 펼쳐지는데, 이는 작가가 애초부터 이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풀고 싶은 마음보다는, 추억의 갈피를 뒤적이듯 자유로운 회상에 자기를 맡기고 싶다는 욕구 쪽이 강했던 게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이 소설의 격을 폄하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 소설에 임하는 작가의 정서적인 측면이 그렇다는 거지 그것이 작품성에 무슨 해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치열한 주제의식´이 어쩌니저쩌니 하는 말들은 일단 소설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그 소설을 되짚어 보며 하는 말일 뿐, 대개 한 작품의 감동이란 무엇보다 작가가 자신이 쓰는 이야기에 스스로 얼마만큼 애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게 보았을 때, 앞에서 말한 ´추억으로서의 글쓰기´나 ´삽화적 구성´은 이 소설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애착을 말해주는 것이지 작가적 자세와는 별 상관이 없다.
실제로 이 소설은 우리에게 뭉쿨한 감동을 남겨 준다. 작가는 기지촌의 한 인물마다에, 어느 날의 달빛 한 자락, 어느 가게의 낡은 간판 하나마다에, 지극한 애정을 쏟아가면서 기억의 사진첩을 뒤적거린다. 이 소설의 감동은 바로 그 따뜻한 시선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의 진지하고 따뜻한 회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리얼리즘이 되어 기지촌이라고 하는 특수한 촌락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내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이 소설은 94개의 매 장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첫장의 제목은 ´길´이다. 그것은 무슨 길인가, 한 소년이 앞으로 자신이 살게 될 새로운 마을 - 이른바 기지촌이라 불리우는 특수한 촌락으로 처음 들어서는 길이다. 미군 기지가 세워지면서 마을 하나가 새로 만들어지려 하는 것이다.
그 길을 걸어가며 소년은 이런 생각을 한다.
산비탈을 깊게 파서 닦은 그 넓은 아스팔트 길은 부자 나라 미국이 만든 것임을 말해 주었다. 그 나라 군인들이 사는 곳에 살게 되면, 우리 집안도 잘 살게 될 터였다.
소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이기만 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실상 기지촌을 찾아드는 모든 어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좀더 나아지리라는, 나아지기만 하면 번듯하게 바깥 세상으로 돌아가리라는, 그런 소망이 이 곳을 찾아드는 모두에게 있었다. 그리하여 기지 건물만 세워진 채 아직 미군은 들어서지도 않은 썰렁한 마을로 속속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니, 이들이 방을 만들고 가게를 꾸미며 어서 미군이 들어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에는 참으로 절실한 무언가가 서려 있어 독자마저 그 기다림에 동화되어 간다.
한 마을의 경제를 낯선 외국군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 특수한 공동체 기지촌은, 당연히 바깥 세상과는 다른 고유의 정서와 풍속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아주 쉽게 단합하기도 하고 아주 쉽게 반목하기도 한다. 서로의 처지가 빤하다 보니 속속들이 그 심정들을 이해하면서도 대개는 지극히 이기적으로 자기 입장만 챙기려 든다.
미군에 대한 이들의 감정도 매우 복합적이다. 기본적으로 미군은 이들에게 고마운 존재이다. 자신들의 생계가 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군에 대한 그런 고마움의 밑바닥에는 실상 대미 의존이라고 하는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 깔려 있는 것이지만, 당장 그들에게 전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기지촌 사람들에게 그런 인식이 자리잡을 여지는 없다.
하지만 가끔 그 서글픈 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생겨난다. 색시가 미군에게 맞아 죽어도 제대로 하소연할 데가 없다거나, 미군 병사들에게 출입금지령이 내려져 마을 전체가 대번에 무기력하게 가라앉는 그런 때이다.
작가는 기지촌의 이런 실태에 대하여 특별히 사회적,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다만 개인적인 애틋한 감회로 그 시절을 추억할 뿐이고, 그리하여 기지촌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의미를 떠나 하나의 숙명적인 슬픔으로만 다가온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이 소설은 기지촌에 내재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성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소설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쪽은 아니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어쨌거나 그 점은 이 소설이 지닌 한계이며 약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눈길에 추억이 서려 있다고 해서 이 소설이 기지촌의 현실에 대한 실감있는 묘사마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무엇을 고발한다거나 깊이있는 사유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가의 담담한 서술을 통해서도 기지촌의 여러 아픔은 충분히 증언된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작가의 따뜻한 눈길이 그 자체로 도달한 리얼리티라 할 것인데, 예컨대 ´여름 저녁´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다음과 같은 장면은 애써 목소리 높이지 않으면서도 기지촌에 담긴 슬픔과 그 역사성을 뭉클하게 전달한다.
미군이 손짓을 하자, 색시가 일어섰다. 미군에게로 몸을 굽히더니, 그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그가 껴안으려 하자,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가 벽에 걸린 남포의 심지를 낮추려고 돌아섰을 때, 나는 그녀의 조그맣고 동그란 젖무덤을 보았다. 그러자 아까 물봉숭아꽃들을 보고 느꼈던, 서글픔 어린 그리움이 다시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복거일은 작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줄곧 떠올렸다. 헤밍웨이가 자신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에 대해서 했다는 말을: ˝이 작품의 비밀은 상징이 없다는 것이다.˝ 노인은 노인이고 바다는 바다고 새치는 새치고 상어는 상어란 얘기다.
<노인과 바다>에 대한 헤밍웨이의 말을 툭 인용해 놓고 작가는 더 이상 뭐라 덧붙이지 않는다. 아마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으리라.
색시는 색시고 미군은 미군이고 기지촌은 기지촌이다.
이 말은 결국 이 소설이 ´추억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말이다. 작가는 애써 어떤 목적을 설정하지도 주제를 정하지도 않은 채, 다만 자기 기억 속의 어느 마을과 사람들을 그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 기억에 대한 끈적한 애착 하나만 가지고.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여 우리는 이 소설에서 굳이 상징이나 의미를 찾지 말도록 하자. 그저 작가의 아슴한 눈빛을 따라 지금은 쇠락해 버린 어느 기지촌을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보자. 그런 무심한 동행만으로도 우리는 잔잔한 슬픔에 이르게 되고 뭉쿨한 회한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불쑥, 우리 현대사의 한 비극이 가슴에서 되살아나기도 할 것이다.
색시는 색시고 미군은 미군이고 기지촌은 기지촌인데, 그 이야기가 슬픈 건 그게 우리 아버지와 누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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