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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영웅전설 |  | |
| <지구영웅전설> (박민규, 문학동네, 2003)을 읽다.
작가 박민규에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안겨준 본 소설은 일단 무협지에 근접한 내용으로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던 <은하영웅전설>과 매우 제목이 흡사하다는 점, 그리고 난 무협지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점, 게다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내게 강하게 어필했던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읽게 되었다. 비록 제목의 한계 상, ´은하´를 무대로 삼아 우주를 주름 잡는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스케일은 작지만, 지구를 지키느라 (실은 미국의 패권주의로 상징화된 자본주의와, 백색 인종이 우월하다는 Racism을 전 지구에 전파하느라) 도저히 쉴 틈이라고는 없는 슈퍼맨, 배트맨 로빈, 원더우먼, 아쿠아맨,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바나나맨´으로 구성된 슈퍼 특공대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슈퍼´한 고뇌와 애환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평가 받을 수 있다.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쯤은 세계의 모든 불의를 응징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회의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어릴 적에 세상은 거인들이 보는 만화책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이미 결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결정론적 회의론에 염세주의를 더한 사상에 휘말렸던 때가 있으니, 아마 7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비록 거인들의 만화가 정의가 승리하는 결말의 내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악당의 무리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잠 자는 모습 한 번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의 수많은 만화 주인공들에게 타도될 것은 자명한 세상이었다. 마징가 Z가 떠나면 그레이트 마징가가, 태권V와 이별 후에는 ´84 태권V가 지구의 정의를 지켰으며, 그랜다이저는 독수리 5형제에게 바톤을 넘겼고, 정의의 힘에 공백이 생길 양이면 심지어 미덥지 않은 심형래마저도 우뢰매가 되어 지켜왔던 지구가 아닌가. 어찌 감히 악당이 발을 디딜 곳이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역시 누가 뭐라고 해도 악당의 무리를 쳐부수기 위해서 애쓴 ´슈퍼´한 영웅은 슈퍼맨(오죽하면 이름도 슈퍼맨이겠는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기 위해 지구를 거꾸로 돌려 시간을 되돌리는 엽기적인 행각도 서슴지 않았던 로맨티스트이자, 팬티를 겉옷 위로 입는 독특한 패션에 가려 빛을 잃었지만, 돼지 꼬리마냥 꼬여서 내려오는 한 올의 앞 머리를 컨셉으로 한 헤어 스타일을 고수했던 스타일리스트이기도 한 슈퍼맨이야말로 정녕 위대한 지구의 (보다 정확히는 미국 자본주의의) 영웅인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과 함께 ´슈퍼´한 파워의 슈퍼맨은 자신의 지위를 ´세계 최고의 재벌´이며, ´초능력에 의존하는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막대한 자본과 첨단의 장비로 무장하여´ 영웅의 지위에 오른 배트맨 - 부르스 웨인 - 에게 이양한다. 이데올로기의 종식과 자본주의의 태풍이 전 세계를 강타하게 된 데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과연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원더우먼이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난처한´ 복장으로 근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계의 섹스 산업과 스크린을 주관해야 하기 때문임을 이해하고 있는 인류가 있을까? 게다가 미국인도, 백인도 아닌 변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서둘러 이 책을 읽어볼 일이다.
슈퍼한 영웅들의 집단인 슈퍼 특공대에 별로 슈퍼하지도 않고, 고작 월마트에서 원더우먼이 부탁한 탐폰을 사오는 것을 담당하는 ´바나나맨´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또한 이 책의 또다른 묘미일 것이다. 이름부터가 도저히 슈퍼 특공대일 수 없는 바나나맨은 결국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생계를 꾸리며 영웅답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냉장고에는 햄버거를 가득 채우고, 도저히 R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그러나 영어 공부만큼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 저열한 한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겉 모습은 비록 노랗지만 속은 희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영혼은 이미 백인인 한국산 바나나맨은 과연 누구일까? 그저 단순히 ´미친´ 놈일까? 그렇다면 난 온전한 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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