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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선문 |  | |
| 레마르크 : <개선문>
역자 : 홍경호 / 출판사 : 범우사 / 출판일 : 1999년 12월 10일 / 페이지수 : 528
전쟁에 의해 짓밟히는 인간의 존엄성
레마르크의 ´개선문´ 은 제 2차 세계 대전 직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전쟁터의 참상은 전혀 그려져 잇지 않으나 이데올로기의 충돌에 의해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짓밟히고 파헤쳐진 한 유능한 외과 의사를 통해 전쟁이 가져오는 정신적 피해가 어떤 것인지 독자에게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주인공 라비크는 독일에서 베를린 대학 종합병원의 외과 과장을 지낸 유능한 의사였으나 두 명의 유태인 친구를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며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여자가 자신으로 인해 끌려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이 숨겨 준 친구 중의 하나였던 유태인 작가가 잡혀와 고문에 못 이겨 죽는 것도 보았다. 그런 육체적, 정신적인 고문 끝에 라비크의 감성은 죽어 버린 것이다.
나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한 인간이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고 부서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 앞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관념이 얼마나 쉽게 파괴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가치해지는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유태인 작가가 죽은 뒤 라비크는 강제 수용소에서 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에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한 끝에 피난민이 되어 프랑스 파리로 오게 되었다.
파리에서 무능한 의사 베베르와 뒤랑의 수술을 대신해 주어 그 수입의 일부를 제공받으며 유령 의사로 생활하던 라비크는 조앙 마두라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애인의 죽음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라비크는 그런 그녀를 도와 죽은 애인을 처리하고, 조앙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으며 생활할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까지 마련해 준다. 그 과정에서 둘은 사랑을 하게 되었으나, 서로에 대한 라비크와 조앙의 태도는 퍽 대조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되어 죽게 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라비크는 또 다른 상처를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사랑을 한다. 연인인 조앙 마두에게 절대 필요 이상 마음을 열지 않으며, 그녀를 잃게 되더라도 상처받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다.
반면 조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라비크에게 맡기고 정열적인 사랑을 꿈꾼다. 그녀는 라비크의 소극적인 태도를 못마땅해하며 그것으로 인해 라비크와 충돌을 일으킨다. 이 역시 인간적인 감성을 죽여 버린 라비크의 내면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전쟁이 한 인간의 감성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잃게 하는지를 보여 준다.
아무런 목표가 없이 기계적인 생활을 반복하는 라비크의 눈에 자신을 고문한 사람이자 연인 시빌을 죽게 한 원인이었던 하케라는 남자가 들어오자, 라비크의 생활은 변한다. 라비크는 하케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하케에 대한 복수가 라비크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유일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복수의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오고, 라비크는 지난날의 혼란스러운 생활과는 달리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그를 죽인다. 이것으로 라비크가 사랑가는 이유나 생활의 목포는 사라졌지만, 그의 불행의 원인이었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상 라비크는 특별히 달라진 것 없는 생활을 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라비크에게 조앙 마두의 전화가 걸려 온다. 도와 달라는 조앙의 애원을 라비크는 자신을 속이기 위한 연극으로 생각하고 무시하지만, 곧 조앙과 함께 사는 남자가 라비크의 호텔로 찾아온다. 그가 조앙에게 총을 쏘았고, 조앙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들은 라비크는 조앙의 아파트로 달려가 조앙을 자신이 일하는 Dr.베베르의 병원으로 데려가지만 조앙의 소생은 가망이 없었다.
라비크는 조앙의 곁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하나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던 나를 당신이 살아가게 해 주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내부에서 그 무엇이 찢어져 나갔다´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라비크의 심리상태와는 달리 그는 조앙이 죽은 후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간호사 외제니에게 ´12호실 환자가 죽었어.´ 라고 태연한 듯 말하는 라비크의 내면상태가 어떤지 독자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부분은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린 라비크의 내면과 심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라비크의 마음을 닫히게 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에서의 고문이었지만,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또 다른 라비크는 언제든지 태어날 수 있다. 전쟁이 아닌 일상에서도 인간의 감성을 말살시키는 고문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설 <개선문´>에서의 마음을 완벽하게 닫은 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생활과 심리 묘사를 통해 전쟁의 두려움 이상으로 독자가 생각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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