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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에밀 졸라 : <목로주점>

역자 : 정성국 / 출판사 : 홍신문화사 / 출판일 : 1994/5/1 / 페이지수 : 498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상의 피곤함과 사람살이의 고달픔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 문단의 평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졸라를 일약 스타덤에 끌어올린 화제작.
작가 스스로 자신은 자연주의 작가로 불리기를 원했을 만큼, 소설은 인간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탬과 뺌이 없이 서술해 간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기초 위에 서 있으며, 그리고 거기 희망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작가는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그 희망을 단호히 부정하고 배신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다.
알베르 까뮈의 지적처럼 인간의 죄를 증거하는 데는 성경이나 하나님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점은 목로주점이 보여주는 인간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가?
˝정말이지, 나는 욕심 많은 여자가 아니에요.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내 소원이라야 그저 착실하게 일하는 것과, 세 때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 내 침대 위에서 잠자고, 그래요, 남편에게 매 맞지 않고 사는 것이에요.˝
그러나 주인공 제르베즈는 이 소박한 꿈으로부터도 가차없이 버림당한다. 물론 우리는 그의 어리석음과 낭비벽, 그리고 모질지 못함 등을 그의 불행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 있다. 죄인이 아니고서는 그런 고통과 불행을 뒤집어쓰고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니체가 말한 대로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오류는 이런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불행은 그가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불행한 존재이기에 그의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병에 걸리기 때문에 약해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성실을 강조하고, 게으름을 경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진단이다.
제르베즈의 불행은 그의 노력으로 피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 죄인된 인간의 숙명이 있다. 삶은 벌이다. 그러므로 각종 종교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최후의 심판이니, 종말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헛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이보다 더 불행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또 다른 심판이 필요하며, 무엇 때문에 그로 인한 또 다른 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지독한 새디스트거나 아니면 세 끼 굶은 암코양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틀림없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주인공들이 겪는 이런 불행의 배경에 대한 일언반구의 설명도, 또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한 마디의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찬찬히, 그러면서도 세밀히 그려내고 있다. 결코 흥분한 문체가 아니며,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살자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소리높여 선동하지도 않는다. 그저 괴로움 그 자체인 인생을 담담히 묘사한다. 졸라가 돋보이는 것은 이 점이다.
인생의 고통 근저에 있는 원인을 설명하지도 않고, 또 그로부터 탈피하는 길에 대한 대안의 제시도 없지만, 그러나 그의 글은 우리에게 설명 없는 설명으로, 대안 없는 대안의 제시를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죄에 대한 벌로써 주어진 고통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고통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단지 그 고통을 더할 뿐, 결코 덜지 못한다. 소설의 제목 <목로주점>은 그래서 고통으로부터의 잠시 휴식이다. 깨어 있는 이성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인간 현실에 대한 눈감음. 술 취함은 우리에게 현실을 잊게 한다. 비록 그것이 아편 같은 휴식이고, 몇 시간 후면 또다시 찾아올 고통을 잠시 잊어버리는 휴식이지만, 그래도 끊임없는 고통보다야 나은 것이다.
˝아! 세상 사람이 뭐라 하건 알 게 뭐야. 이렇게 즐거운 기분이 되어 보기는 난생 처음이야.˝
그토록 증오하던 술을 마시며 중얼거리는 제르베즈의 독백은, 힘겨운 지옥의 고통을 잠시 내려놓고 한 숨 돌리는 구원의 휴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졸라가 제시하는 삶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인생이란 게 단지 고통 가운데서의 잠시 휴식만이 의미의 전부인가? 그렇다면 인생이야말로 허무와 공허, 그 자체일 것이고, 유일한 해결책은 빨리 죽는 것 외에 무슨 다른 길이 있을 것인가? 내가 대안 없는 대안의 제시라고 표현한 졸라의 역설은, 인생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돌이켜보면 제르베즈의 인생도 때로는 희망에 싸이기도 했고, 잘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듯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졸라의 지적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장밋빛 꿈이라는 점이다. 우리네 인생에는 랑티에 같은 놈이 언제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제르베즈가 행복해지는 꼴을 보지 못한다. 또한 쿠포라는 인간 역시 희망으로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와서는 제르베즈를 잠시 감상에 젖게 하지만, 그 감상이 얼마나 유치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 졸라는 아주 비참하리 만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그리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 차리라. 너의 인생은 네가 네 꿈을 맘껏 그릴 수 있는 하얀 도화지가 아니란다. 네 옆에는 언제나 너의 그림을 망쳐버릴 인간들로 즐비하단다. 문제는 네가 그들을 알아볼 수 없다는 점. 이 얼마나 기막힌 코메디더냐. 그러므로 그대는 삶의 차원을 바꾸어야 하느니. 지금 있는 거기서의 성실이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 성경이 「믿음」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 차원이 다르기에 믿음이 등장하는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는 노력도 의미 있고, 성실도 의미 있지만, 그것이 다른 차원의 얘기가 되면 그것은 현재 있는 차원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강렬한 몸부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느니…제르베즈가 끝내 구제의 사랑을 거절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제르베즈에 대한 믿음의 부재.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아직도 남아 있는 그녀의 자존심. 로리웨 부부에게 고작 10수를 빌리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어도, 또 몸을 팔아서라도 한 잔의 술을 사기 원할 정도로 배고픔과 알콜 중독에 시달리지만, 그래서 제르베즈에게는 아무런 자존심도 남아 있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끝내 구제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제르베즈의 한계고,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인간들의 한계다. 구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제르베즈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갈등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하고 있으니…, 제르베즈가 들으면 기가 막힐 일이다.
나는 앞에서 졸라가 [대안 없는 대안을 제시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사실은 구제가 그 대안의 한 모습일 수 있다. 당신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러나 우리가 보다시피 제르베즈는 그 사랑을 받지 못한다. 왜냐? 서 푼 어치도 안 되는 그녀의 자존심 때문에. 인간의 양심과 율법은 이토록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그래서 양심과 율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시편 저자가 말한 대로 「자기 고난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호, 통재라.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직시하면서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끝내 다다를 수 없는 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끄러움을 버려야 한다. 떳떳해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르베즈처럼 한심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몸을 팔면서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추위와 배고픔. 인생의 쓰라림과 괴로움 속에서,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아비규환의 현장. 손을 내밀고 구제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는데도, 끝내 하찮은 자존심으로 그 사랑을 거절하는 제르베즈의 모습은, 에밀 졸라가 고발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 고통의 원인인 것이다. 하나님을 심판자로만 인식하고,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 진단이 정확하면 처방도 정확한 법. 아! 끊임없는 인간의 무명(無明)이여. 그 영원한 간격이여! 제르베즈는 언제나 구제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이 내리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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