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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사고>

역자 : 유혜자 / 출판사 : 아래아 / 출판일 : 1999/3/31 / 페이지수 : 102

이 책은 절대 추리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만큼 끝없는 반전을 시도하는 책도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처음, 소개란에서 작가를 봤을 땐 저명한 티벳의 철학자 같았다. 검은 뿔테에 백발머리, 얼굴에서 배겨나오는 신비스러움, 로댕을 연상시키는 손가락의 포즈...난 그의 얼굴을 보고, 또 ´사고´라는 제목만을 보고선 마치 붕 뜬 풍선을 무작정 따라가는 꼬마처럼 책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책 찾기는 쉽지 않았고. 여러 서점을 찾은 뒤에서야 발견 한 책은 실망스럽게도 내가 상상했던 책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내용은 90쪽도 채 되지 않았고 작가 또한 티벳인이 아니었다. 그는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저명한 독일인이었다.(좀머씨 이야기나 다시 만난 어린 왕자를 생각한다면 이 책의 글씨 크기와 쪽수에 대해서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독선이었고 고정 관념이었지만 그래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사고´ 역시, 이 단어가 동음 이의어란 것에 주의해 봐야 했다. 즉. 이 내용은 절대 철학서가 아니었다. 마치 작가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편협된 고정 관념에 빠졌던 것을 반성하라는 듯 이, ´사고는 간단했다.´라고 시작하여 ´단순한 엔진 고장이었다´라고 쐐기를 박아 놓는다. ´사고는 간단했다. 단순한 엔진 고장이었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의 첫 문장대로, ˝정말 이런 우연적인 일들이 일어날수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니, 작가는 아무래도 이 우연적인 사고로 시작되는 첫 문장을 통하여 이 책이 얼마나 우연적인 요소로 가득 차 진행되는지에 대해 미리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주인공 트랍스는 아내와 아들 넷을 둔 단란한 가정의 아버지이며 스투 데베커를 몰고 다니는 섬유회사의 상사로 현실에서는 능력 있고 행복감 에 절어있는 중후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정말 우연한 자동차 엔진사고로 어느 작은 마을에 하룻밤 머물게 된다. 그러나 정말 우연히도 그 마을의 모든 하숙집은 만원 상태였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적한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게된다. 숙박비를 받지 않는다는 주인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혼자 사는 것이 쓸쓸해 가끔 이런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사실, 집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나 꼬실까 하는 생각에 머무른 그에겐 노인의 제안이 탐탁지는 않지만 무숙박비를 말하고, 혼자 사는 노인이 고맙고 불쌍하여 저녁 식사를 승낙한다.)
식사 시간이 되자 노인은 자신의 친구들도 불러 식사를 하고 간단한 게임도 하자고 한다. 그는 흔쾌히 승낙하고, 드디어 게임이라 말하는 ´모의재판´이 진행된다. 트랍스는 피고를, 노인의 친구들이 각각 재판관, 검사, 변호사, 사형 집행자를 맡는다. 이 재판은 특정 사건이 아닌 피고인의 인생에서 재판을 하는 것으로 트랍스는 별 죄가 없는 그의 인생에 대해서 당당해 하며 자신의 얘기를 한창 하던 중 자신의 승진과 관련된 직장 상사의 심장마비와 그 상사 부인과의 불륜 관계에까지 이르게 되자 검사는 이것을 중점적인 사건으로 포착해 트랍스를 재판에서 불리한 형세로 몰아넣는다.
검사는 그 모든 것이 트랍스의 의도적인 행위로, 사무적이고 강직한 직장 상사에게 그 아내와의 불륜 관계를 몰래 알림으로써 고질병을 알고 있던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그 모든 일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그 상사의 대를 이어 일개 판매원에서 스투데베커를 몰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출세를 행했다고 말했다.
결국 트랍스는 모의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제. 여기서 주의할 것은 트랍스의 행동 변화이다. 그는 맨 처음에는 자신의 죄에 대해 말하는 검사의 말에 분개해 했지만 점차 자신의 살인을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전직 볍조인이며 지식인이라 일컬어지는 그들 속에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 능동적인 존재로 느껴지고 이때껏 맛보지 못했던 극도의 행복상태로 치닫게 된다. 결국 그는 그 행복감의 영원을 위해 떠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자살하고 만다.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후기에서,
˝이 세상에 아직도 작가가 쓸 이야깃거리가 남아 있는 걸까?´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아주 우연적이고, 스쳐지나갈 수 있는 사건을 소재로 잡아 글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은 경이롭고 흥미롭다. 뒤렌마트의 아주 짧은 사고. 이것은 단순한 엔진 고장으로 시작해. 내 머리에 사고 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방을 따로 하나 만들어 놓고 가 버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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