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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시대 |  | |
| 은희경 : <서정시대>
출판사 : 문학동네 / 출판일 : 1998/1/26 / 페이지수 : 232
은희경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이 단편은, 일찍 어른이 되도록 강요당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 진지함과 고지식함으로, 자신의 땜통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매우 의식적으로, 서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소설은 그래서 ´누군가 등을 가볍게 건드리는 기척이 느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속속들이 감추고 있던 그녀의 약점들이 원형탈모로 흉하게 드러나는 순간의 신호다. 주위의 머리카락으로 아무리 빗고, 덮어도, 벌겋게 드러나는 그녀의 환부.
열아홉, 스무 살의 그녀가 온갖 진지함으로, 또 고지식하므로, 또는 어리숙하고 순정적으로 겪은 사랑이, 어느 순간 나의 땜통이 드러나는 듯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할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동생은 가출하고, 집은 망해 가고 있는 그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만의 진지함으로 불행해 할 줄 몰랐던 사춘기 소녀. 아니, 그녀는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지금 자신은, 사춘기이므로, 현실의 불행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역겹지만, 그녀는 ´이미지적인 일에 투자´하는데 몰두했고, 남들이 이해 못할수록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드높은 자아를 가졌다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19세, 대학의 첫 발걸음. 예쁜 꽃핀으로 상징하는 그 시절의 순수. 첫 미팅으로 만난 남자의 반항적 이미지들은 아직도 내가 좇고 있는 환상인데. 나의 환상은 이제 은희경으로 들통나버린 나의 땜통이 되었다.
절망스럽고, 또 우스꽝스럽다. 아..여기서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가 20년이 지나고서야 깨져버린 첫사랑이 남아있는데.....그녀는 대학 서클로 만난,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잘생긴 외모로, 뭇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녀석과 어설픈 사랑을 나눈다. 서로 자신에게 진지하느라 정작 사랑에게 진지하지 못했던 그들은, 밋밋한 시간을 보내다가, 멋있게 헤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짐짓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그러다가 이 ´미욱한 커플´은 다시 재회를 하고, 조금 진전되는 듯 불편한 손도 잡아보고, 팔짱도 꼈다. 이 커플을 보는데, 철없이 어른이 되고 싶은 한 소녀가 엄마 하이힐을 몰래 신고, 갸우뚱갸우뚱 걷는 것을 볼 때처럼 눈살이 찌푸려졌다.
스무살 되던 어느 겨울날, 그녀의 진지한 농담으로 첫 키스에 실패하고 그들은 흐지부지 헤어졌다. 세월이 흘러서, 영화처럼 잠깐 스친 순간도 있었지만 정말 영화처럼, 그녀에게 애인과 함께 한 순간이었다. 나도 이것이 그녀의 첫사랑이고, 소중히 간직되기를 바랬다. 진지함은 진지함이고, 땜통은 땜통이고, 첫사랑은 첫사랑인데. 그녀는, 20년 동안 둘만의 비밀스러움인 줄만 알고 있었던 첫사랑이, 다시 만난, 그 시절 서클 남자친구를 통해, 그녀는, 그때 그 시절에, 자신만 진지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첫사랑 그에게 그녀는 그저 깜찍하고 귀여운 여자친구였음을, 그는 인물 좋고 학벌 좋으며 집안까지 좋아야하는 속물적인 조건의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계획이 있었음을. 그녀는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첫사랑의 남자에게 보기 좋게 차이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나도 웃는다. 이렇게 웃긴 게 사는 것이군, 하고. 소설가인 그녀는, 이 ´웃긴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구상을 한다.
제목, ´첫사랑´.
그런데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소설을 구상하다가, 반항적 이미지의 첫 미팅 남자를 떠올렸던 그녀는, ´잠깐, 내가 혹 지금까지 첫사랑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나가 버린 날의 일이라고 해서 의미를 바꾸지 말란 법은 없다. 첫사랑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면 첫사랑에 대상은 바뀔 수도 있다.´
정말 이렇게 간단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다시 자신의 원형탈모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화장실 붉은 불빛에, 한눈으로 들여다보이는 땜통. 땜통은, 감추다가 들키면, 아무리 명랑한 척을 해도 스스로 민망해지고 얼굴을 붉혀진다. 좀 뻔뻔스러워져서, 하하, 웃다가도 겨드랑이로 땀이 흐르는 이 당혹감.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진지함을 깨닫는다.
´나만 몰랐어.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몰라.
혼자만 진지해 갖고 말야. 얼마나 푼수 같았는지.
그냥 우스운 존재로 살면 그만인데 난 그게 잘 안돼.´
이 농담 같은 소설은, 잠깐 나를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더니 곧 내 땜통을 발견하게 한다. 그래서 지금은 몹시 불쾌하고, 아직은 나 자신에게 웃어줄 수 없다. 하지만 하나 웃긴 건, 삶은 농담 같고 나만 진지했다는 거. 난 이걸 너무 빨리 알아버린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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