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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솜바지 |  | |
| 안정효 - <솜바지>
세상 한켠의 삶
묵직한 책가방에 눌려 어깨를 늘어뜨리고 지친 다리를 터벅거리며 귀가할 때마다 나는 자신이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등진 노인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이내 골목골목 대문 앞에 걸터앉은 이들의 맥없는 시선을 느낄 때면 그런 생각은 여지없이 사라지고 만다. 유난히 거뭇하고 쪼그라든 모습, 세월이 지나간 골이 팬 얼굴, 움푹하니 초점 없는 눈..., 버석버석 살이 튼 손가락에 담배 한 개비를 끼워 들고 조심스레 연기를 내뿜는 이들의 모습은 막 지나온 지나치게 기운찬 거리와는 분리된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정지된 화면처럼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 그들을 볼 때마다 기운 빠진 나의 젊음은 오히려 교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들에게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차라리 나의 무거운 가방을 지워 주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들에게 남은 생이 그렇게 느릿하게 골목이나 지키며 나머지 세상을 허무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끝날 것만 같아서다. 그러나 여기 한[一] 노인의 자살 기도라는 이야기를 통해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나의 가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노인은 18년 전 아내를 여의고 슬하에 세 자녀와 증손까지 거느린 대가족의 가장이다. 원래 자식이 일곱이었지만 둘은 전쟁 중에 그리고 하나는 폐병으로 죽었고, 막내딸은 일찍이 유부남과 도망간 후 소식이 없다. 이것만 봐도 결코 평탄한 자식 농사는 아닌 셈이다. 지금은 그의 냅킨 공장을 물려받으려는 의도하에 그를 모시고 있는 아들과 손자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데, 간간이 환갑이 가까운 딸 언년이가 찾아오곤 한다. 언년은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소박을 맞고 그의 둘째아들, 즉 그녀의 오빠집에 얹혀 살고 있는데, 그런 그녀가 한 노인에게는 언제나 가슴 아픈 존재다.
한 노인은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점차로 자신에게 소홀해져 가고 때때로 눈치마저 주는 가족들로 인해 서글픈 것도 그러려니와 아내가 죽은 후로 집안의 소일거리나 돌보고 있는 그에게 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기거하고 있는, 창문 하나 없는 컴컴하고 볼품없는 창고방 역시 자신의 초라한 신세만 같아 내심 새의 일은 아니지만, 죽은 아내의 생일날에 유난히 그런 결심이 선다. 아내를 잃은 뒤 아내 있는 노인들을 보며 부러워하던 한 노인은 죽은 아내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지고 혼자 남아 이리 살아 뭣하나 하는 생각에 차라리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어려운 시어머니 밑에서 일곱 자식을 거뜬히 키워 냈던 아내는 전쟁 중에도 옷감장사로 온 식구를 걱정 없이 먹여 살릴 정도로 억척같이 부지런한 여자였다. 한 노인이 휴전 후 선로 반원이 되어 생활이 안정되었는데도 별별 수로 돈을 모아 대던 살림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였건만 남편 시중만큼은 손이 커 매 끼니마다 넘칠 듯 한 상을 차려 오곤 했는데, 손주며느리의 매몰차게 깔끔한 밥상에 한 노인은 그녀가 그리워지곤 했다.
아내를 회상하며 이래저래 죽을 채비를 하던 한 노인은 옛날 아내가 지어 준 솜바지를 입고 아내의 옥비녀와 사후에 대비한 연락처까지 지니고 집을 나선다. 달라진 세상... 빠져 죽을 생각에 한강을 찾은 그는 예전과는 달리 오염된 강의 모습에 주춤하고 잠시 쉬면서 아내를 생각한다. 한때 바람을 피워 아내를 속상하게 한 것이 새삼 미안하고 죄스러워진 한 노인... 이내 속죄인 양 그녀의 옥비녀를 품고 강으로 투신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솜바지 때문에 자꾸만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결국 경찰에게 구조되어 파출소에서 취조를 받기에 이르고, 난처해진 그는 무연고자를 가장하지만 곧 들통나고, 아들은 파출소로 불려오게 된다. 아들의 힐난에 버럭 소리를 지른 한 노인....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아들의 눈물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는 다시금 죽음을 생각한다.
이 소설은 다소 곰살맞은 노인의 어조와 유머러스한 상황을 통해, 한 노인의 자살 기도라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어둑한 감상 속에서 동정심이나 일으키도록 하진 않았다. 사실, 한 노인은 그다지 불쌍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노인은 아니다. 오히려 안정된 환경 속에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어찌 보면 ´팔자 좋은´ 노인이다. 그런 그 노인의 지나치게 여린 마음 탓이라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 노인들이란 그저 아이처럼 여리고 엄살 많고 눈물 많은 이들이라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내가 얼마나 노인들에 대하여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크고 작은 일상의 사건 속에 한 노인이 느끼는 감정들...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한 노인의 행동들은 나에게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쓸모 없는 잡동사니들을 기어이 보관하겠다고 우기시던 할머니... 그 때는 그 분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분이 마치 구시대의 전형적인 산물인 양 못마땅하게만 생각되었다. 내가 내다 버리라고 종용하던 고물들이 그 분에겐 소중한 과거와의 연결 고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고, 소위 합리주의 사조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그런 행동들은 그저 옹색하게만 느껴졌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지 못한 그 분의 수많은 감정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한 노인을 통해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가족들의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 마음을 의탁할 심정이었을 수도 있고 그 분 역시 죽을 결심을 몇 번이고 하셨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모든 노인들 역시도 그런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한창 시절 사회를 주도해 오다 이제 세상 한켠으로 몰러나 던져진 몸만큼이나 답답한 일상에 갇혀 과거에의 미련과 그리움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우리 사회는 너무나 몰인정하지 않은가 싶다. 바쁜 세상을 핑계로 그들을 소외시키고 노둔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무슨 죄나 진 양 거추장스러워 하는 시선들도 있다. 이러한 세태로 그들에게 자신들이 사회의 짐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하고 그들의 삶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지도 모른다.
한 노인의 자살 기도는 이런 사회 속에서 초라해진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자살이라는 것에 몹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내가 그를 몰지각한 노인네라고 비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직도 그를 전부 이해할 순 없지만, 한 노인의 죽은 아내의 검소함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손들의 아낄 줄 모르는 씀씀이를 비난하고 아내의 풍성한 밥상을 거론함으로써 손주며느리의 지나친 합리주의에 곱지 않은 시선을 주고 있다.
이것은 한 가정 안에서의 비교를 떠나 옛사람들의 검소하면서도 정겨웠던 생활상과 의식을 현대인들의 그릇된 풍토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리라.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수도 없이 듣고 읽어 왔지만 좀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종전의 경우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아마도 이 소설의 맛은 이렇게 생활 속의 이야기에서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있지 않은가 싶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노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그들에게 메어 줄 가방이 아니라, 잠시 멈추고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 마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사회의 동정의 대상이 될 순 없다. 그들은 연로하나 귀해야 할 삶을 가진, 오히려 더 배려 받고 존중받아야 할 사회의 일원이다. 한 노인의 아들의 눈물은 그의 마음에 약간의 동요를 주었지만 결심을 돌리게 하진 못했다. 내가 그들에게 가방을 지워 준다고 그들이 내 삶을 이양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그들을 대할 때 발걸음을 조금만 늦추어 본다면 분리된 세계의 벽은 조금씩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 노인처럼 한강을 찾는 노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노인들에게 솜바지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날 걱정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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