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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제자 |  | |
| 하근찬 - <여제자>
진실된 사랑을 찾아서
철없는 동심으로 지내 온 어린 시절에도 가슴 설레는 사랑에 관한 추억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들 자신은 그 당시에는 자신의 감정을 잘 파악하지 못했기에 가슴속 깊이 퍼져 오는 애틋한 감정이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온 것이다. <여제자>를 대하는 순간 평상시에는 잊고 지내 온 어린 시절 나의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나의 시선뿐만 아니라 정신 세계도 책과 동화되어 갔다.
´따르릉...´
전화 벨 소리는 세월의 흐름을 가볍게 뛰어넘어 주인공인 강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계기로써 귀를 통해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강 선생님의 기억의 실타래 속에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하나의 매듭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홍연이라는 여제자의 목소리는 선생님의 심정을 마치 소풍 전 날 밤의 유치원생과도 같이 두근거리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한 두근거림의 감정은 나에게는 생소하기도 하며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떤 만남 이후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의 재회란 이제 겨우 30년이라는 세월의 반을 살아온 나로서는 체험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도 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강 선생님처럼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했던 인물들을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 삶이란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앞으로도 내가 만나야 할 인물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고, 또 지금까지 만나 온 이들도 수없이 많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 모두를 좋게 기억하고, 그리고 나 자신도 그들에게 좋은 추억 속의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 나가야겠다.
여제자에 대한 강 선생님의 추억은 선생님을 6.25 이전의 한 시골 초등학교의 교단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강 선생님과 홍연이의 만남은 초등학교의 스승과 제자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만남은 때론 시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한 홍연이의 일기를 통해 시작되었다.
´나는 달밤이면 아무 까닭도 없이 울고 싶어진다´라고 시작하는 홍연이의 일기는 사내아이들이 흔히 쓰는 하루 일과를 요약한 투박한 글과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자기의 감정을 꾸밈없이 과감하게 표현한 홍연이의 일기를 보니 하루 일과를 억지로 쥐어짜서 쓴 어린 시절 나의 일기가 너무나도 한심스러워 보였다. 왜 그 당시에는 일기 쓰는 것이 그렇게 싫었는지 어머니의 기도로 써 오던 것마저도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만둔 것이 아쉽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기는 형편없는 글 솜씨로 씌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시절 추억을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올리게 해 주는 없어서는 안 될 나의 귀중품 목록 1호이기 때문이다. 홍연이에게도 일기는 강 선생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이다. 일기를 통한 강 선생님의 관심은 홍연이를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
스승과 제자의 미묘한 감정 사이에는 사회적 통념이라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였다. 즉, 강 선생님은 자신이 선생님이라는 신분 때문에 홍연이를 좋아하는 감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예로부터 유교 중심의 사회인 우리 나라는 남녀간의 사랑에 많은 제약을 가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일지라도 서로 좋아한다면 좀더 자신의 감정에 진실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강 선생님보다는 홍연이가 더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두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1년의 세월이 흘러 종업식을 하는 날 홍연이는 선생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와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으로 눈물을 흘려 본 적은 없지만 헤어짐이란 그 말만으로도 왠지 사람을 아쉽게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강 선생님은 6학년이 된 반 아이들을 다시 맡게 되었다. 홍연이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조금의 양보고 없이 찾아와 그들의 행복을 빼앗아 갔다.
그 해 여름, 민족 상잔의 비극인 6.25의 영향은 시골 초등학교에도 예외 없이 찾아온 것이다. 한 마디 이별의 말도 못 나누고 홍연이와 강 선생님은 헤어진 것이다. 역사의 존재 앞에서 작은 티끌에 불과한 사랑의 나무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땅속 깊숙이 뿌리 내린 그리움을 참다못해 혈서를 써 보낸 것이었다. 좀 섬뜩한 감도 있지만 이 뭉개지는 아픔을 감수하며 쓴 혈서 편지는 너무나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직까지 이성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리워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진실된 사랑의 힘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자꾸만 메말라 가는 현대 사회를 홍연이의 피로 물든 투명한 비로 깨끗하게 씻고 싶다.
요즘 젊은 연인들 사이에는 만나자마자 결혼하고, 결혼하자마자 이혼하는 것이 무슨 유행인 양 거리낌없이 행해지는데 정말 한심스러운 일들이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도 깨닫기 전에 인스턴트식으로 가볍게 즐기고 말자는 현대인들의 사랑관은 분명 우리가 없애야 할 문제이다. 홍연이가 감정에 복받쳐 피로 쓴 편지에도 불구하고 강 선생님은 선생님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의식한 나머지 답장을 안 한 점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상대방에서 그렇게 간곡하게 그리움을 표시하였음에도 우유부단하게 지나쳐 버린 강 선생님의 행동은 결국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관계만을 남긴 채 영원한 이별을 만들어 냈다. 내가 강 선생님이었다면 혈서 편지를 받은 후 적어도 한 번쯤은 홍연이를 직접 찾아갔을 것이다. 그것이 홍연이의 애절한 편지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일 텐데....
세월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잊고 무심히 흘러 홍연이와 강 선생님을 각각 중년의 부인과 중년의 소설가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중년의 부인이 되어서 찾아온 홍연이도 나이 지긋한 강 선생님도 상대방 앞에서 수줍어하고 가슴 설레던 그 모습은 사랑의 지속성을 보여 준다. 너무나 순수하여 투명하기만 했던 홍연이의 사랑은 혼탁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그 투명한 빛을 아름답게 발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홍연이처럼 변함없고 순수하며 때론 열정적이기도 한 진실된 사랑을 찾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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