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허삼관 매혈기 |  | |
| 위화 : <허삼관 매혈기>
역자 : 최용만 / 출판사 : 푸른숲 / 출판일 : 1999/2/3 / 페이지수 : 342
<수다스러움을 통한 건강성의 회복>
▶ 매혈과 죽음에 대한 공포
어린 허삼관은 할아버지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피를 팔지도 않은 녀석이 무슨 뼈대가 건강하느냐고. 매혈과 건강함의 상관 관계,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린 허삼관은 넷째 삼촌에게 반문한다.
˝무슨 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몸이 튼튼한 사람은 다 가서 피를 판단다. 한 번 피를 팔면 35원을 받는데,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고 그렇게 많이는 못 벌지. 사람 몸 속의 피라는 것은 우물의 물처럼 퍼내지 않으면 많아지지 않는 거거든. 네가 매일 퍼내도 물은 아직도 그렇게 많이...˝
사람의 몸은 우물이고, 피는 우물의 물이다. 아무리 퍼내어도 줄어들지 않는 것이 우물의 물이고 피다. 더 이상 피는 생명의 존엄성, 또는 제의와 연관된, 성스러운 상징이 아니라, 모든 상징적인 의미가 거세되어 일차원적으로 환원된 하나의 ´물질´일 따름이다. 피의 사용 가치(생명 유지)는 상품화를 거쳐 교환 가치에 포섭되었다. 이제 피는 돈 35원이고, 건강함을 인정받기 위한 도구가 된다.
˝삼촌, 삼촌 말씀대로라면 피가 바로 돈줄이네요?˝
이 얼마나 웃지 못할 아이러니인가. 그것이 장기 매매, 암시장이 버젓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 섬뜩한 해학처럼 들리는 것은, 비인간화라는 추상적 불안보다도,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육체적인 공포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천진난만한 허삼관의 말 속에는 원치 않은 순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으며, 교통 사고와 다른 것이, 죽음의 칼자루를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 스스로 쥐고 있다는 점이다.
허삼관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다.
˝오늘에서야 피땀 흘려 본 돈이 어떤 거라는 것을 안 셈이지요. 제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라고. 오늘 번 돈은 피흘려 번 돈이잖아요. 이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써 버릴 수는 없지요.˝
피를 흘림으로서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은, 피를 판 돈으로 전혀 불가능했던 소비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가능에서 오는 일시적인 쾌락(또는 즉흥적인 소비 욕망의 금욕을 통한 쾌락)에 의해 애초부터 무시되거나, 대개는 급박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에 부딪혀 반성의 시간적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은 경우들이다.
그런데 이락이의 생산대에서 온 대장을 대접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미 한 달 전에 피를 판 허삼관은 다시 돈을 마련하기 위해, 혈두를 찾아가는데 그 곳에서 근룡이와 방씨의 사정을 목도한다. 오줌보가 터진 방씨와 뇌일혈로 쓰러진 근룡이, 둘은 어린 허삼관이 처음 피를 팔 때 앞장서서 도움을 주었던 인물들로 허삼관에게 그들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건강함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근룡의 죽어가는 모습은, 순식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킨다. 시시각각 죄어드는 한기로 인해 전신을 떠는 허삼관의 모습은 피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오는 생리적인 육체의 표현임과 동시에,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영혼의 표현이기도 하다.
˝허삼관은 속으로 ´이락이를 위해서, 이락이를 위해서라면 마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셔야지.´라고 생각했다.˝
과연, 극한의 한계 상황 속에서 허삼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간의 집약된 정신이고, 신념이다. 그것은 휴머니즘의 다른 말이기도 한, 보편적인 인간애를 향하고 있으며,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에게 뭘 해 줄 거란 기대 안 한다. 다만 나중에 나에게, 내가 내 넷째 삼촌에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줬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내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 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에서 드러나듯이 거추장스러운 조항들을 모조리 빼어버린, 최소한의 윤리만을 강조하는 형태이다. 결국 ´양심´이란 하나의 단어로 압축되는 허삼관의 윤리관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에 앞서, 하나의 ´인간´을 발견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효도, 공경 따위의 사회적 윤리가 아니라, 어쩌면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초적인 윤리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따뜻한 정의 윤리이고 눈물 몇 방울 속에 녹아 흐르는 연민의 윤리이다. 허삼관의 ´양심´에 대한 신념은 순식간에 죽음을 불사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이락이를 위해서라면˝이라는 절박한 외침 속의 ´이락이´는 둘째 아들 이락이를 지칭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간애에 대한 대상으로서의 ´인간´을 지칭한 것이다. 일락이의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 조그만 육신 하나로 매혈 여로를 거친 허삼관의 모습은, 위의 연장이랄 수 있다.
˝저야 내일 모레면 쉰이니 세상 사는 재미는 다 누려봤지요. 이제 죽더라도 후회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들 녀석은 이제 스물한살 먹어서 사는 맛도 모르고 장가도 못 들어 봤으니 사람 노릇을 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러니 지금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지...˝
허삼관의 소박한 마음씨는 매혈의 교환 가치 논리와 선명히 대비되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끈끈한 변주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연상케 한다.
▶ 수다스러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다스럽다. 작품의 구성도 대부분 대화체로 되어 있어, 인물들의 수다에 현장감을 불어넣는다. 허삼관과 허옥란을 중심으로 옥신각신 벌어지는 말싸움과 문간에 주저앉은 허옥란의 애절한 타령과 넋두리, 하소용과 그의 아내까지 합세한 말싸움, 그리고 구경꾼들의 웅성이는 입담, 무성한 소문들. 일락이가 알고보니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것, 허삼관이 임분방을 건드린 것, 어쩌면 가정의 파탄이라는 비극이 될 수도 있는 불륜의 사건들도 말싸움과 넋두리를 통해 응어리진 감정을 거침없이 토로하고 뱉어냄으로써,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하나 치유되어간다.
수다스러움은 아줌마의 대명사이듯이, ´건강함´의 상징이다. 수다스러움의 원천에 대한 구분으로써 ´영혼/육체´라는 구분항이 성립한다면, 영혼의 수다스러움과 육체의 수다스러움을 우리는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관념적 유희의 소용돌이, 또는 트리비얼리즘(trivialism), 이를테면 김승옥의 작품들-의 형태를 의미하며 현실에 대한 패배주의와 그에 대한 도피, 또는 초월로서의 현란한 관념을 채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후자는, 허옥란의 넋두리처럼, 육체가 느끼는 즐거움과 고통스러움과 같은 감정을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양상을 의미한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누. 내가 무슨 수절과부도 아니고, 재가를 한 것도 아니고, 서방질을 한 것도 아닌데, 내 세 아들이 두 아버지를 가졌다니...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누. 내 세 아들은 아버지가 하난데.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구...˝
일상의 생활 공간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구체화함으로써 얻어지는 언어들을, 서민의 입을 통해 리얼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리 와. 문간에 앉지 말라구. 왜 우는 거야? 소리는 왜 쳐? 이 여자가 정말 동네 창피한 줄도 모르는군. 이게 당신이 울 일이야? 당신이 소리지를 일이냐구? 이리 오지 못하겠어...˝
한 쪽이 울면, 한 쪽은 되레 소리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침묵은 오히려 사태를 냉담하게 만들고 미래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저버리게 하는 냉소의 씨앗이 될 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수다스러움은 비참한 파국을 거부하려는 두려움의 표현임과 동시에, 인간 관계에 있어서 최소한의 건강성을 유지하려는 몸짓이다. 우찬제가 지적한 희비극의 교차라는 것도, 그 원동력은 작품 전반에 걸쳐있는 바로 수다스러움이라 할 수 있다.
▶ 평등
위화가 한국어판 서문에 쓴 평등에 관한 이야기는, 평등을 추구하는 두 가지의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12세기 아프리카 북부 시에서 드러난 평등은, 장미의 아름다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격과 같은 존재의 속성들이 자신에게는 부재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열등감의 극복 명제이다. 현실은 불평등한 세계이며, 다만 눈 앞에 펼쳐진 불평등한 현실과 ´모든 개체는 죽는다´라는 사실 명제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상황에서 평등이란, 그저 출구를 찾지 못한 욕망의 이상향이고 삶의 고뇌의 산물일 따름이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서 낙엽처럼 스러지는 욕망과 집착 앞에서, 삶의 번민에서 놓여나는 해방감을, 다시 말해 불평등이란, 욕망의 구조물이었을 뿐이라는 깨달음을 얻게되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 앞에서의 평등은 고통에서의 해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모든 개체는 죽는다´라는 사실의 절대성에 기초한, ´너나 나나 결국 죽음 앞에서는 매한가지´라는 살아있음의 덧없음에 대한 인식은, 모든 존재의 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형태로 변용된다. 그것은 존재 자체를 직시함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존재론적 평등이랄까.
˝그는 생활 그 자체로 마냥 성실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추구하는 평등이란 그의 이웃들이 그렇듯이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에 그가 아주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 그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는 생활상의 편리함이나 불편 따위엔 개의치 않지만 다른 사람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상실하고 만다.˝
허삼관의 이야기는 위와는 정반대의 경우이다. 그는 이웃들과 함께 범속한 삶을 꾸려나간다. 특별히 뛰어나기를, 또는 특별히 못 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남들처럼만 살면 된다. 그것이 허삼관의 평등에 대한 가치관이며, 극단이 아닌, 평균에의 집착에서 소시민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평등이란, 삶의 순응이며 물이 자연스럽게 낮은 데로 흐르듯이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언젠가는 망망한 대해에 이를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이다. 그런데 육체의 노쇠로 인해 피를 팔려다가 혈두에게 소박을 맞는다.
˝댁처럼 늙은 노인 피는 살아있는 피보다 죽은 피가 많아서 살 사람이 없다고요. 칠장이라면 또 모를까...˝
피를 팔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할 수 없다는 비참한 절망으로 이어진다. 쇠락한 육체는 멸시의 대상일 따름이다. 흥망성쇠의 자연적인 단계 중 막바지에 다다른 그에게 남은 것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육체에 대한 한탄이고 가깝게 다가온 죽음에 대한 비애이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노년의 그가 느낀 소외감은,
˝그걸 가리켜서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라는 담담한 한 마디로 표현되고 있다(이 말을 하고 있는 허삼관에게서 우리는 여전히 건강한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소외시킨 세계는 더 이상 평등한 곳이 아니다. 과연 죽기 직전의 그가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까.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