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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밑에 달이 열릴 때 |  | |
| 김선우 : <물밑에 달이 열릴 때>
출판사 : 창작과비평사 / 발행일 : 2002/3 / 쪽수 : 247
<김선우 시인 산문집에 바치는 찬사>
절로 이르는 협곡 길 옆 비탈에 얼레지 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시인께서 눈길을 준 그 꽃이 지천으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지난 해 늦봄, 꽃바람 불고 난 뒤 시절을 놓쳤던 터라 올해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가서는 그 옆 계곡물 소리로 꽃대를 하나 하나 열었습니다.
아, 그러다가 김선우님의 산문집 발간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레지의 무수한 연보라 빛 꽃물이 든 보랏빛 표지의 책을 사들고 저는 오랫동안 읽지 못한 채 무슨 경전을 모셔두듯 책상 위에 얹어 두었습니다. 창백하게 지고 난 뒤 여름이 오기 전 때 이르게 땅속으로 숨어들고 이 땅의 얼레지 꽃 남김없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때나 책을 펼쳐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지 않고 그 책을 만져보기만 해도 당신의 마음이 묻어납니다.
아, 당신은 바람이고 자유입니다. 선계로 돌아간 여신 난설헌이 다시 이승으로 환생하여 당신의 몸을 빌렸습니다. 그렇듯 당신은 여신입니다. 당신의 책을 넘기며 부분부분 눈길을 멈추면 그 소리들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먼 공중으로부터 들려옵니다. 이 땅의 상처 위로 생명수를 부어 새살을 돋게 하여 거기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워 올리는 당신의 계시를 두고 여성성이니, 에코페미니즘이니 하는 말들이 다 무엇입니까. 이 또한 당신이 준엄하게 꾸짖는 남성들의 횡포가 아닐까요? 그들의 무지 속에서 당신의 말들은 영원히 해독되지 못할 계명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요, 당신은 외롭습니다. 당신의 책을 소유하고 그 글을 읽어야 할 우리도 외롭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의 절망을 끝까지 품고 그 상처 속으로 소생의 젖을 물리는 당신의 모습은 그래서 참 아름답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얼 레 지 얼 레 지 얼레지 꽃이 시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땅이 열리며 얼레지가 묻혀가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달려가야겠습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당신의 보랏빛 책이 짙어갑니다. (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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