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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에 대한 예의 |  | |
| 공지영 : <인간에 대한 예의>
출판사 : 창작과비평사 / 출판일 : 1994년 6월 1일 / 페이지수 : 334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지>
386세대라 말하기에는 아주 어설픈 나에게, 80년대 끝자락에 대학엘 들어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우수수 그 깃발을 내리는 90년대에 졸업을 한 나에게, 우리의 역사가 던지는 의미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나만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졸업한 뒤로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주제들을 비껴나가고자 했던 것 같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읽어낼 기회도 없었다. 이제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으니, 무언가 정리한 것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려버린 듯한 느낌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길목은 정말 과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일들은 많은 사람들이 구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반기는 이들은 자본주의의 승리라며 흥분하며 냉전이 사라진 이 후 세계질서의 패권에 대하여 진단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놓고 열띤 토론에 대안모색으로 또한 분주했다. 한치 앞에 대한 예견이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말로만 듣던 1987년의 6·10항쟁의 전설은 우리 나라 민주주의의 한 획을 그었다고들 하는데, 여전히 국내정치는 평안하지 못한 것 같고, X세대의 등장으로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문화적 충격은 내게는 신선하기도 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스스로 나의 대학시절은 과도기였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에는 위와 같은 주변 정세가 많이 작용하였다. 우리를 보는 80년대 초·중반에 대학생활을 한 선배들은 세상 좋아졌다고들 말을 하면서 선배들의 그 시절 고민들을 그대로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옳은 말들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리 당위성으로만 다가오던지...
이제 내가 넘겨주어야 할 차례에 와서는 자신 있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되지 않음에 나 스스로도 많이 고민했지만, 이런 감정들은 자연 억누르게 되었다. 나의 말을 듣는 후배들은 예전의 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당위성조차 그리 인정하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끼며, 졸업과 함께 나의 이러한 기억들은 향수로 기억 한편에 묻어두고 있었다. 묻었다고는 하지만 덮은 흙의 두께가 얇아, 미풍에도 덮은 흙들은 날아올라 언제든지 제 맨살을 드러내고 마는 그런 기억들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흔히 실천문학이라 일컬어지는 글들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읽기도 했다. 현장에서의 삶을 다룬 내용,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어느 활동가의 수기, 그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의 고백과도 같은 소설들, 이러한 글들이 내게 기쁨과 감동을 주고, 위안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한 시절에 접했던 글 중 하나가 이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1994년에 출판되었으니 내가 읽은 것도 그쯤이었나 보다. 며칠 전 책꽂이를 눈으로 쓱 훑어보던 중 이 책이 눈에 들어와 다시 꺼내게 되었다. 1998년부터 1994년까지 여기저기 발표했던 9편의 중단편의 글들을 묶어 창작집으로 내놓은 것이다. 작가의 경험과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전형적인 386세대라 할 수 있는 작가는 이 글들이 그녀 또한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로부터 먼저 등을 보인 자책감을 가슴에 담고 있는 상태에서 발표한 글들이다. 그래서 그 속에 아직까지 몸 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우러나오는 글처럼 치열하지는 않고, 아예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본 이들의 글처럼 냉소적이지도 않아 다소 글의 분위기가 어둡고 침울하다. 1988년에 소개된 ´동트는 새벽´의 끝에서는 희망을 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1990년을 넘어서면서 보여주는 작가의 글은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쓰디쓴 패배의 잔을 마신 듯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서로들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그 기억들을 들춰내는 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세상을 보게된 그녀의 작품은 이러한 등장인물로 인하여 그 색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어두운 색을 띠는 작가의 90년대 초기의 작품들을 최근에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가슴 저리는 듯한 경험과는 사뭇 다른 덤덤한 느낌으로 빠른 손놀림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제 이러한 화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나도 다시 읽는 이 책을 무덤덤하게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간 것일까?
얼마 전 공연을 보러 세종문화회관엘 갔었다. 근데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구호소리들, 쿵쿵 울리는 음악소리들이 들려왔다.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장애인들의 보행권 확보를 위한 소규모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선 나를 당황케 한 것은 50여명 되는 이들을 앞에 두고 마이크를 잡고 열띤 목소리로 외치는 20대 초반의 학생들로 보이는 6명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연신 ´동지들´을 외쳤고, 그 목소리와 어투는 예전과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들의 머리는 모두 울긋불긋했고, 허름한 티셔츠에 힙합바지를 입고 있었다.
흥미롭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를 또 한번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그들의 노래였다. 그들의 생각을 담은 노래를 들려주는데, 처음 듣는 멜로디로 보아 창작곡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에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듣던 그런 노래가 아니었다. 빠른 랩으로 시작하여 중간에 반복적인 멜로디가 잠깐 들어가고 다시 랩으로 이어지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참 유행하는 형식의 음악이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노인네 같아지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들을 좋아한다. 일부러 구입해서 듣고 때로는 유치하게 느껴지는 가사도 따라하곤 하는데, 이날 이들이 랩으로 전하는 내용은 알아듣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것을 보며 생각했다. 80년대를 힘들게 넘긴 이들이 이날의 집회를 보았다면 무어라 했을까? 혹시 나만 이렇게 긴장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연하게 여기는 변화들을 말이다. 무척 궁금했다. 변화는 한 곳, 한 부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은 작은 변화라도 그 파급효과는 크고 속도 또한 예전엔 상상하지도 못했을 만큼 빨라졌다. 그러니 이러한 형식의 변화 또한 예견된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자꾸 뒤쳐지려는 내 맘을 되잡아 세웠다. (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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