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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유산 |  | |
| 찰스 디킨스 : <위대한 유산>
역자 : 김태희 / 출판사 : 혜원출판사 / 출판일 : 2001/4/25 / 페이지수 : 304
중학교 때 내가 들은 CA부서는 ´영어영화반´이었다. 영어와 영화를 모두 좋아했던 나에겐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전일제날 실제로 영화관에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교실에서 비디오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1년 동안 본 비디오 중 유일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위대한 유산´뿐이다. 그것도 기네스 펠트로우가 입었던 짙은 풀색의 셔츠만 생생하다. 단추가 딱 하나 달린 그 옷은 핍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키스하는 에스텔러의 이미지 그대로 무척 야하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또한 도도했다.
그리고 4년 정도가 지난 지금, 난 이제야 ´위대한 유산´을 책으로 읽게 되었다. 지하철을 타면서 읽은 그 책은, 재밌었다. 이 단순한 느낌은 내겐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전을 읽으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한 적은 ´제인에어´ 이후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읽은 부분과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의 두께를 비교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아쉬움에 손끝을 떨어본지가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그렇게 ´위대한 유산´이라는 소설 속에서 메그위치에게 ´위대한 유산´을 받은 핍은 지하철 안의 나에게 또 한번 ´위대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1인칭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능숙함이 잔뜩 묻어있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자신의 회상일 뿐이라는 것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편집하여 수많은 시간들이 도려내진 가운데 인쇄된- 핍에겐 중요한 일화들만으로 그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중년에 막 들어서려는 지금의 시간까지 나를 끌고 왔다. 그 도중에서 난 그의 연약함과 가난에 대한 비애와 동경하는 이를 향한 사랑에 동요되었고, 그의 옹졸함과 지난 시절을 피하려는 비겁함과 돈으로써 자신의 추함을 감추려는 무지함에 눈을 흘겼다. 300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나는 수도 없이 핍과 나의 내면 의식을 바꾸었다.
나는 특히 해비샴과 에스텔러, 두 사람을 통해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해비샴이 늘 입고있던 빛 바랜 웨딩드레스와 9시 20분 전에 멈춰진 시계는 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닫힐 수 있는지, 과거의 시간-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을 얼마나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상처받은 해비샴에게 길러진 에스텔러는 남자들을 이용하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용되며, 인생의 황혼기를 맞을 때까지 ´사랑´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며 살아간다.
´독일인의 사랑´에서 막스 윌러가 말하듯, 이 세상의 사랑은 너무도 인위적이다. 생일 케이크의 초를 하나 둘씩 늘려가면서도 갓 태어난 아기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전혀 특별하지 않게 생각한다면 어떨까? 어쩌면 핍은 신사가 되기 위해 그의 자형과 비디를 멀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에스텔러 역시 ´난 사랑이라는 감정은 느낄 수 없어.´라고 거듭 말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해비샴의 이름 밑에는 ´나는 그녀를 용서한다´라는 문장이 쓰일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점점 겉치레에만 신경을 쓴다. 꼭 무슨, 항아리 속에 든 오물을 모르게 하기 위해 도금을 하고,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장식을 하는 꼴이다. 그러나 항아리 속에서 새어나오는 고린내는 항아리와 금, 보석 모두를 더럽게 만들뿐이다. 우리에겐 더 많은 조가 필요하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남들에겐 우스워 보일지라도 소신을 지키며 사는 대장장이 조와 같은 이는 그의 주변 모두를 아름답게 제련해나가니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 역시 조에게 담금질을 당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얼른 살을 빼서 에스텔러의 풀색 셔츠를 입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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