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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꽃 |  | |
| 정길연 : <종이꽃>
출판사 : 이룸 / 출판일 : 1999/4/10 / 쪽수 :324
<어긋난 사랑 방정식>
´변명´이란 소설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정길연의 창작집 종이꽃. 형형색색 시드는 법 없는 매 마른 종이, 그 생명력 없는 종이꽃을 접는 여자를 소재로 시대에 얼토당토 않는 어긋난 사랑과 일그러진 가족의 균열을 미묘하게 그려 놓았다. 작가는 버림받은 여자의 내면 심
리를 섬세하게, 깊이 있게 파헤치면서 그 현실적 문제 원인과 해결책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의식 저편에서 영원히, 순백의 백지로 지워버리고 싶은 여인의 출생, 선택의 여지없이 태어난 여인의 탄생일과 아비의 죽음 날이 어쩌면 우연의 갈림길처럼 같을 수 있을까. 그로 인해 성장 내내 ´지 애비명 줄 끊어 제 탯줄에 겁 없이 이어 붙인 년´이란 소리를, ´이 세상에 내보낸 은공을 원수로 갚는 년´이라고, 증오에 가득 찬 소리를 엄마로부터 들으며 종이꽃 접는 여인은 자라게 된다. 물론 한 날 한 시도 그 앙칼진 넋두리를 잊어 본 적이 없을 만큼 들으면서 성장한다. 그런 소리를 지겹게 지른 친정엄마의 부음을 접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평생 친정 호적에 얹혀 살다가 법적으로 처녀 몸인 채 숨을 놓아버린 엄마. 그 엄마의 죽음 앞에서도 결코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딸은 엄마를 위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만큼 독하게 침착하다.
두 달간 얼음 빗장 지르며 애써 그녀의 존재를 무시한 그녀의 남자. 현재 별거중인 부부이지만 미망(未亡)의 구차함으로,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체면치레로서 부음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다.
별거 중인 이 부부의 갈등 사유는 아내쪽의 일방적인 임신 중절이다. 불임의 원인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을 아는 아내가 무참하게도 남자 모르게 수술을 받은 것이 그들의 별거 이유였다.
어머니의 죽음, 허위허식의 수행자로 마주 보게된 상황에서 그녀만의 잘못된 사랑의 실제가, 개명(開明)한 시대에 쉽게 납득할 수 없는, 하지만 그녀에겐 운명의 무서움으로 점철된 사랑법이 비로소 드러난다.
사람의 숙명은 고고의 음성을 울릴 때부터 가슴에 담고 세상에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환경과 여건이 사람의 일생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듯이 그로 인해 인생이 행복할 수도,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 것처럼......
그런 차원에서 생명 없는 종이꽃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 그녀의 숙명은 처음부터 죄인 아닌 죄인의 멍에를 둘러쓰고 태어났던 모양이다. 그로 인해 남들처럼 아이의 장난기로 건짜증도 낼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허튼 데 없이 반듯하고 가려운 속내를 쏙쏙 집어내는 그녀를 남편은 한때 목숨같이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조차 금슬에 대한 시샘이라고, 검증되지 않은 속설까지 들먹이며 우겨 믿었다. 의학적으로 별다른 이상이 없는 부부임에도 좋은 소식이 생기기는커녕 느긋하게 마음먹고 기다려라는 산부인과 의사의 소리는 어느 곳이든 한결 같다.
시간이 갈수록 절벽끄트머리까지 바짝 내몰린 느낌에 마침내 그녀는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된다. 스스로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 더 이상 주위 사람들을 우롱하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 를 들은 여인은 의식적으로 아이를 거부하는 심리가 자기 안에 자리잡혀 있음을, 불임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그제야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아이를 거부하는 심리의 배경은 무엇일까.
치욕스런 상처나 과거의 악몽이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걸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에게 말한들 씨나 먹히겠나 하면서.... 그녀의 과거 출생에 연루된 문제는 이들 부부를 힘들게 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남자는 이 여자를 만나지 말아야 되었을까.
제 몸 속에 오로지 저를 의지하여 깃들인 생명을 악착같이 잘라내고도 태연히 꽃을 만들던 아내. 색색의 종이를 접으며, 어느 날 실날 같은 생명을 파지처럼 구겨 폐기한 뒤에도 말끔하고 태연한 얼굴로 흰 꽃, 붉은 꽃 수북수북 접고 있던 아내를 남자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결코 여자는 남자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읊조린다.
˝너를 견디느니 너를 버리리라. 버리고 또 버리리라.˝
이 한 문장으로써 남자가 받은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대변 해주지만, 역시 여자가 섣불리 털어놓을 수 없는 숨막히는 절규도 내용을 조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녀는 자기와 같은 업을 지고 나올까봐 두려웠다고, 사랑하는 남편을 잃을까봐 두려웠다고, 그래서 아이를 지웠다면... 이해가 되느냐고 절규한다. 부모 명줄 뚝 끊어먹는 애물소리, 태어나면서 죄인이 되어버린 입장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죄다 내 아이 탓으로 돌려질
까봐 무서웠고, 친정 엄마처럼 나 역시 정신 나가 버릴까봐, 내 아이가 나처럼 살게 될까봐 무서웠노라고...... 그녀의 공포심에 가까운 이 운명의 한 부분을 들어보면 어처구니없지만, 약간은 이해가 될까?
인생은 묘하게도 자기가 경험한 만큼만 이해되고 생각이 나듯이 난 어떤 예감에, 머피의 법칙 같은 부조화를 이룬 징크스 등에 몸을 사리게 된 적이 있다. 그랬기에 그녀의 가당찮지도 않은 사랑 방정식이 당연 얼토당토 않는 것이면서도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그녀는 친정엄마와 자신의 출생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얼마나 무책임하게 한 생명을 저주했는지 하는 근원적 상처로부터는 영원히 헤어날 수 없음을 철저히 보여주고 있다. 아마 작가도 이 점을 그녀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닐까 한다.
다행히 아내의 말을 듣고 사태의 진상을 비로소 알게 된 남편은 생명도, 향기도 없는 종이꽃에 대한 분노를 조금은 누그러뜨리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이 따위 종이꽃을 이리저리 자르고 구긴 종이 나부랭이가 산목숨보다 중할까. 네 새끼보다 더 중해 보이냐고 짓이겼던 꽃을 다시는 불에 넣지 않을 것이라고 그 다음 장면을 연상해 보면서 이 소설집을 닫았다.
딸들은 자라면서 엄마의 보이지 않는 그늘 아래 많은 영향을 받는다. 책을 통한 것보다 오히려 더 짜임새 있는 지혜와 여성 본분을 배우며 자란다. 굳이 엄마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터득한다.
이 작품은 가족의 책무(責務)가 얼마나 막중한 가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누구나 다 아는 바이지만, 그래도 떠올리게 만든다. 엄마의 회한은 결코 엄마 몫이지 그것을 딸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얼마나 딸의 일생에 치명적인 굴레를 씌우는지, 가장 가까이서 어루만져줘야 할 인간 관계인 ´가족´이 뭘까 새로운 과제거리를 던져준다.
비단 균열이 간 가족 소설이지만, 충분히 우리 주변에 묻어날 이야기인 것 같아 이번 소설을 단지 흥미거리가 아닌, 사회 저변에 일어날 수 있는 우리 얘기인 것 같아 두 번이나 책을 펴 들었다. 다시 읽으며 작가가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를 생각하면서....
가족이란 무엇일까?
구성원 그 어떤 이든 불유쾌한 상처받았을 경우 관심과 격려 한마디, 감싸주는 배려,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의무가 가족의 할 일이 아닐까. 내 아이들과 남편의 어떤 부분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성깔 부리던 나의 모난 부분도 이참에 고치도록 해야겠다. 어떤 고난을 당하고 겪더라도 한 배를 탔다는 가족이란 이름 아래.
잠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되짚어 보게 해 준 작품이라 좋은 느낌으로 이 책을 기억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30대 작가에 당당히 정길연씨도 등록이 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교보문고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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