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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사고의 숲 |  | |
| 로버트 홀드스톡 : <미사고의 숲>
역자 : 김상훈 / 원서명 : Mythago Wood / 원저자명 : Robert Holdstock / 출판사 : 열린책들 / 출판일 : 2001/9/30 / 페이지수 : 412
<귀환을 거부한 영웅>
▶1. 귀네스
크리스찬은 동생에게 그녀에 대한 편지를 쓴다.
˝<감정, 마음, 영혼, 이성, 요리하는 능력 기타 모든 것을 그녀에게 빼앗겨 버렸어, 스티브>˝(22p)
스티브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크리스찬은 그녀를 잃어버린 후였고 그녀를 찾기 위해 숲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숲 밖에 남겨진 스티브는 어느 날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운명적인 사랑―그의 아버지도, 형도 똑같이 치렀던 통과의례―을 경험하게 된다
귀네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녀에 관한 언급은 아버지의 편지에, 그리고 일기에 나타난다. 켈트족의 전설을 통해 그녀의 탄생을 추측해 볼 수 있는데, 1942년 5월의 일기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 동쪽에서 온 군단(로마 군대)이 침략해 옴
- 족장의 첫 번째 딸 리아산은 로마 군 지휘관과 사랑에 빠짐.
- 두번째 딸 디어드라스는 같은 부족 내의, 추방당한 전사의 아들 페레더와 사랑에 빠지고 딸 귀네스를 낳음.
- 석녀(石女)인 리아산은 디어드라스를 질투하여 귀네스를 빼앗음.
- 페레더는 딸을 구하기 위해 마녀 자가드의 힘을 빌림.
- 자가드의 힘으로 페레더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독수리로 변신하여 로마 군의 진영으로 날아가 딸을 구해냄.
- 구하는 과정에서 페레더는 적의 화살을 맞고 죽음.
전설은 로마 침략군과 브리튼의 정착 부족인 켈트족 사이의 갈등과 불화라는 역사적인 맥락을 바탕으로 한다. 세분하자면, 켈트족 내부에서 리아산으로 대표되는, 로마 문명에 동화하려는 집단과 디어드라스로 대표되는, 켈트 정신을 지키고 로마에 저항하려는 집단 사이의 갈등이다. 귀네스는 갈등의 결과물로서, 그녀는 켈트인의 피를 이어받아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갈색´의 눈빛과 ´타오르는 듯한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전통적인 사냥 복색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질적인 문명에 관심을 보이고 친숙한 모습을 보이는―로마 식의 욕조에 관심을 보이는 장면(133p)은 한 예이다―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두 개의 역사적 문명의 정신적인 혼합물로써, ´켈트/로마´, ´숲 안/숲 밖´, 그리고 ´신화/현실´이라는 양자를 잇는 통로 내지, 교통관의 역할을 한다.
아버지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녀가 저항했던 로마 주둔지의 문명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에 대한 면역이 없다. 진실로 그녀는 켈트 족 공주의 이상화된 상(像)이다. 윤기 있는 붉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어린아이처럼 가냘파 보이지만 강인한 육체. 그녀는 전사이다. 그러나 그녀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익숙해 보이지 않고 어색하다.˝
전설 속의 인물과 사랑에 빠진다. 그것은 이 작품을 흐르는 전체 주제임과 동시에 전설, 또는 신화에 접근하는 한 개인의 양상을 보여준다.
켈트 신화를 찾아보았지만, 귀네스와 연관된 자료는 없었다. 작가의 허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그것이 문학적 장치이기 이전에, 작가 한 개인이 만든 신화를 작품 속에 개입시키는 행위가 어떤 의의를 지니느냐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2. 숲을 찾아서
그녀를 크리스찬에게 빼앗긴다. 스티븐은 그녀를 찾기 위해 숲의 길로 들어설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귀네스를 빼앗기기 전부터 암시되고 예정된 길이기도 하다. ´아웃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혈족에 관한 신화는 무의식의 잔존물로 잠복되어 있다가 비로소 신화의 현실화 문턱에 이른 것이다. 상징(체계)의 현실화는 사회생활의 긴장과 교체, 궁극적으로 우주의 리듬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미 프리 미사고 영역의 활성화가 깊숙이 진행된 스티븐은 숲의 숨결, 이끌림에 따라 숲이 간직하고 있는 길을, 잃어버린 귀네스를 찾아가는 길을 향해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간다. 조셉 켐벨의 영웅 신화 구분에 따르면 영웅이 소명 의식을 받는 단계이다.
귀네스의 전설에서 나타난 골육상잔의 모티프는 크리스찬과 스티븐에게도 반복된다. 풍요로운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demeter)와의 연상관계에 있는 귀네스가 ´아웃사이더´의 손에 빼앗긴 이후로 숲의 세계는 점차 황폐한 모습으로 변한다. 크리스찬과 스티븐은 형제이면서도 적이다. 그것은 저주받은 운명이기도 하고 ´정복´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양극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형제간의 경쟁, 대립 관계는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과 약육강식의 광폭한 체험을 통해서 형성된다.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 크리스찬, 형의 여자를 사랑한 스티븐. 그것은 금기를 어기고 자연의 풍요로운 여신과 달콤한 사랑에 빠진 자들이 겪게 되는 고난의 길이다. 결국 ´빼앗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강력한 힘의 논리이고 음울한 피의 얼룩이다.
미사고는 신화와 심상의 합성어이다. 결국 상상력의 집합물이란 뜻이며 엄밀하게는 신화적 상상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했듯이, 신화적 상상력이란 현대인에게는 소멸된 어떤 독특한 사고의 형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17세기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과학과 논리의 양과 질 때문에 현대인의 사고가 고도로 체계화되었지만 사고를 운용하는 방식―세계를 하나의 보편으로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방식―은 신화적 상상력이나 동일한 것이다. 차이라면, 현대인의 사고는 분절성을 토대로 불연속적이고 비가역적인 양태로 드러난 것이고 신화적 상상력은 연속성을 바탕으로 총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형태라는 점이다.
작품에서의 ´숲´은 상징, 신화의 보고(寶庫)의 역할을 한다. 또는 개개의 마음속에 잔존하는 신화적 인물을 투영시킬 수 있는 거울이거나 가상의 실체를 직접 등장시킬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저 고대의 숲, ´원초의 숲´에서는, 집적된 오라 그 이상의 것, 극히 강렬한 그 무엇인가를 형성해 우리의 무의식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인 장이라고나 할까.˝
숲에 접근하는 인물들, 아버지, 윈 존스, 크리스찬, 스티븐, 이 모두는 늘 숲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동반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어떤 ´총체성´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고, ´중심3´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중심은 작품에서 ´라본디스´라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신비에 쌓인 장소,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호기심을 가로막고 있는 영역. 아무도 갈 수 없는 곳. 불가지(不可知)의, 잊혀진 과거.´ 즉, 중심은 세계의 끝이며 지상의 세계가 아닌,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천상의 공간이다. 최후의 결투 현장에서 만난 크리스찬은 종교적 해탈의 심리 상태 가운데, 유독 중심에 대한 애착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심으로 걸어가는 도중 스티븐이 던진 떡갈나무 잎에 의해 우연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그것이 ´아웃사이더´ 전설의 결말이고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한 파에톤적 비극이다.
▶3. 아버지와의 화해
켐벨의 영웅 신화의 단계를 요약하면,
- 모험에의 소명을 언도받고,
- 모험의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선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절대(絶大)한 시험을 당하고, 시험에 이기면 보상(전리품)을 받고,
- 전리품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로 귀환한다.
신화에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중요한데, 특히 입문(통과의례)에 있어서 거쳐야할 관문이라기보다 입문자가 입문 의식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모험 단계에서는 아버지와 불화 상태를 이루지만 모험의 결말에선 아버지와 화해를 한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자아와 아버지의 상과의 합일을 이루고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져 일개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거듭남을 의미한다. 즉, 아버지는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스티븐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다.
˝그는 거의 침묵 속에서 생활했고, 우리 집과 맞닿아 있는 떡갈나무 숲에 관한 묵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책상 위로 구부정하게 몸을 기울이고 무엇인가를 미친 듯이 갈겨쓰고 있는, 초로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제야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숨을 훅 들이마시며 화난 얼굴을 했고,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손을 흔들어 나를 쫓곤 했다. 그러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자신에게 늘 닫혀있는 아버지에 대한 유년의 기억들로 인해 스티븐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소집영장이 나오던 날 불쑥 아버지의 일기장을 뜯어갈 정도로의 아버지에 대한 동경―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이 공존하고 있다. 요컨대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동경이 그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스티븐이 형 크리스찬의 모습과 아버지가 닮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스티븐의 아버지 상은 좀더 실체화되어 구속력을 지닌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버지-크리스찬(우호), 크리스찬-스티븐(우호), 아버지-스티븐(적대)´ 라는 관계의 삼각형이 존재한다. 그러나 개별 인물들이 스스로의 신화화를 통해 숲에 들어간 이후, 셋의 관계는 ´우르스쿠머그-아웃사이더(적대), 아웃사이더-아웃사이더의 혈족(적대), 우르스쿠머그-아웃사이더의 혈족(우호)´로 역전된다. 원인의 열쇠는 귀네스인데, 크리스찬은 아버지의 세계인 ´숲´에 일찍이 눈을 떠서 아버지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우호 관계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여자인 귀네스를 두고 아버지와 반목을 일으킨 이후 ´아웃사이더´로 변모하여 숲의 파괴자가 된다. 그에 반해 스티븐은 형의 대립자로서, 그리고 파괴자에 저항하는 전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마지막에 귀네스를 아버지 우르스쿠머그에게 양도한다. 스티븐 숲의 질서를 회복시켰으며 귀네스를 살리고 아버지의 인정 또한 받는다.
˝나는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입맞춤의 기억과,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다는 기쁨과 함께.˝
▶4. 귀환의 거부
모험을 마친 영웅은 이전의 세계로 귀환하여 재생의 힘을 일만의 세계로 환원하여야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영웅이 이 책임을 회피한 예는 많고, 심지어 부처까지도 정각(正覺)이라는 승리를 얻은 뒤에 이 소식이 대중에게 전해질 수 있을지 여부를 의심했고, 성자들 중에는 천상적인 무아지경에서 몰沒한 성자가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불로 불사 여신의 축복받은 섬에 아예 영원히 눌러앉아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아웃사이더의 혈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미지의 결말은 전설의 형태를 부여받아 구전되어 남을 뿐이다.
˝그녀는 반드시 올 거요.˝
기다림 뒤에는 구원의 약속이 따른다. 세속적인 역사의 이면을 잔잔히 흐르는 전설은 덧없는, 초라한 일상의 세계를 꾸밈없이 받쳐주고 있다. 결말 부분이 늘 빈칸의 상태로 열려있는 구조.
˝이러한 ´열림´이 도피의 방법이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세계의 진정한 실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는지를 아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는 엘리아데의 구절은 자못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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