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며 만난 기억 속의 나...... |  | |
| 하필이면 그 순간 파란불로 바뀔 게 뭐람.
먼저 인사하려고 했는데. 아니야, 잘 됐지 뭐. 할 말도 없었는데
머뭇거리다 괜히 멍청히 돌아서는 것보다 아예 모른 척하길
잘했지 뭐.그래도 어릴 땐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학교는 들어갔는지, 아직 그 동네엔 사는지,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왜 갑자기 쓸쓸한 거야. 세월이 아무리 무섭다지만 옛 친구에게 인사조차
어렵게 만들 수 있을까?
……………
기억해 보세요. 그 아이의 이름은 석상이랍니다.
집에서 초코우유를 배달해 먹었던 석상이는 유리 속에
초코색이 진한 우유 한 병을 들고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며,
태연아, 놀자! 라고 외치던 아이였지요.
그래요. 난 석상이가 반가웠는지, 초코우유가 먹고 싶은 건지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신도 안 신고 뛰어나가 반기고
우리집 옥상으로 올라가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때 동네에는 우리 또래 남자 아이들이 축구도
하고 제기도 찼지만, 우리는 여자 애들을 더 좋아했던 아이들이었으니까요.
이건 당신도 기억하기 싫어 하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하겠습니다.
초여름날 오후였을 겁니다. 우린 여자 애들을 꼬득여 석상이네 집에 가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목욕 놀이를 즐겼었죠.
대여섯 명이 홀라당 다 벗고 탕 안에 들어가 쿡쿡 찌르고
물 뿌리고 웃어 재끼며 너무도 재미있게 놀았는데,
사실 당신은 그걸 기억하기 싫어 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즐거웠습니다.
물론 석상이도 그랬겠지요, 하하하!
그녀들도 그 일들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만 모두들 잊으려
애를 쓸 겁니다. 사실 석상이나 나나 그땐 남녀에 대해 어떤 것도 제대로 알고
있다고 느꼈고 그것에 대해 커다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석상이와 나
는 그날 이후 목욕 놀이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도 우리의 목욕 놀이에 기꺼이 동참해 주었고,
하지만 금지된 장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석상이와 나는 동네 반상회가 열리면 그날은 엄마에게
재수 좋으면 혼만 나고, 그렇지 않으면 두들겨 맞는 날이었는데
그날은 뭔가 좀 특별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와 함께
목욕 놀이를 했던 여자 아이들이 나쁜 일인지 모르고 떠들고 다니다
그 애들 엄마 귀에 들어갔고 애들이 왜 저러냐는 둥,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는 둥, 반상회가 열리던 그날 밤 두 엄마에게 몰려온 항의가
대단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반상회 날이면 항상 얼굴이 달아올라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물론 그날 나는 난생 처음 매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알기에 충분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도로 엄마에게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물론 석상이도. 그러나 석상이와 나는 다음날 이미 피멍이
들어버린 궁둥이를 보이며 눈물 고인 웃음을 던졌습니다.
석상이와 나는 목욕 놀이가 왜 그토록 심한 매를 맞게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궁둥이에 그려진 일곱 색깔 무지개에게
서로의 입김을 불어, 호오! 해주며 위로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동네 여자 아이들은 석상이와 나를 피했고, 어쩔 수 없이
석상이와 나는 둘이만 놀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석상이와 나는
그런 것에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목욕 놀이는
그저 석상이와 내가 개발한 놀이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런 것 외에도 내가 놀아야 할 세상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넓었으니까요.
그러나 그해 가을 우리집은 이사를 했습니다. 석상이와 나는
우리집 장롱이 타에 실릴 때까지도 서로 헤어진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날도 그저 새로 산 미니카를 석상이와 부딪쳐서
누구 차가 먼저 부서지나라는 놀이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엄마는 나를 부르고, 어야 가자 했고, 석상이는 그저 나보고 잘 갔다
오라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이제까지와
는 생소한 집에서 잠을 잤고, 석상이는 다음날 아침에 우리집 대문 앞에서 태연
아 놀자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렇게도 석상이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애들은 애들이었는지 그 동네에 정이 붙고 서서히 석상이와 즐기던
놀이와 석상이는 내가 아닌 당신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보태 갈수록 목욕 놀이도 장난감 분해도
유치해지고 어느덧 석상이는 당신의 기억 저 멀리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당신은 그 아이를 진짜 십 몇 년만에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것입니다.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당신은 석상이의 어릴 적 그 얼굴을
기억해 내었고, 아주 잠시 놀랍고 반가워 했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당신이 왜 아는 체를 못했냐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의 벽이었는지, 서로의 변한 모습에 쉽게 다가서기
어려웠는지, 워낙 시간이 오래 돼 그 십 몇 년의 공백을 메울
인사말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닙니다, 그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이기적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시간도 바쁘고, 친구도 많고, 해야 할 일도 쌓여는데,
만나야 할 사람이 안 그래도 많은데, 굳이 아는 척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때 무척 외로웠거나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누구라도 만나
시간을 때워야 했다면 석상이는 더없이 알맞은 상대였을 겁니다.
당신은 얼마나 이기적인 놈인지 그 순간에 결정해 버린 것입니다.
굳이 아는 체해 인사말을 찾으려 머뭇거리는 것이 차라도 한 잔 하며
얘기를 해야 하고, 전화 번호를 교환해야 하며, 다음 약속을
정해야 하고, 결국 옛 얘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그 동안의
변화된 모습, 미래의 꿈 등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 심하게 얘기하면
귀찮았던 것이었고, 합리화시키려 하면 순수함을 잃어버린
지금의 당신을 보이기 싫었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는 산타 할아버지도 없고,
목욕 놀이를 해줄 여자 애들도,병에 담긴 초코우유도,
미니카 찌그려 뜨리기 놀이도 반갑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녀들도 당신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어져 안주거리로
만들어지기를 싫어 할 것입니다. 그저 기억 안에서,
엄마에게 엉덩이를 맞고 죽겠다고 울어대던 그 기억안에서 편히 살아가게
해줘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미 당신은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세월에 섞여 놓여진
상황에 적응이 되어 그들과 융화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 다시 석상이와 마주 칠 일은 없을지 모릅니다.
우연이, 착한 마음 먹고 또 한 번 당신을 도와준다 해도 오늘 같은
어색함이 싫어, 머뭇거림이 싫어, 먼저 시선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우리의 예쁜 추억도
투명한 기억도 기억해 내기 힘겨워지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당신이 지금껏 만들어 놓은 이 상황을, 힘들여 쌓아올린 스물여섯의
위치를, 미련 없이 버리고 그때 그 느낌으로 돌아가 살아간다면
당신의 방은 정신 병동 어느 구석 방으로 바뀌게 될 테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틈에 섞인다면 그들은 그런 당신의 모습을
순수하게 보기보다 하나라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당신을 끌고 다닐 것입니다.
당장 당신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먼저
그 선두주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아마 당신에게는 이런 내 이야기도 얼마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왔듯이 살아
가야 하는 이유가 미우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당신을 합리화기켜
석상이를 잊었듯, 느낌대로, 생각대로 살았던 그때를 잃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 스스로 한 일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날 잊어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괜히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하다.
특별히 기분 나쁜 일도 없었는데 오랜만에 지갑 속에 돈도 넉넉한데,
어제 산 바지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데, 이번 학기에는 빵구 걱정도 없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들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 본 일 있나?
왜 이렇게 쓸쓸하지. 왜 이렇게
우울하지.
……왜지?
|
|
|
|
|
